고려와 조선의 가옥 배치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2.06.11
- 최종 저작일
- 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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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에 특징 중 하나는 가묘이다. 가묘의 근원은 주자가례에 의한 것으로, 고려 말 정몽주, 조준 등이 시행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당시는 불교가 성행한 때였으므로 쉽게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가 정교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사당의 시행이 철저히 강요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당을 설치하지 않은 사대부는 문책을 당하기도 하고, 또 이것이 시비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선조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층에 일반화되었고 서인들도 이에 따랐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대청 모퉁이나 기타 적당한 곳에 부설하였다.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이며 주택의 안쪽에 위치하였다.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장자를 비롯한 남자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 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다.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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