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기 정부의 교육정책과 교육사상가00
- 최초 등록일
- 2010.11.20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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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오개혁기 정부의 교육정책과 교육사상가에 대하여
상세하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좋은 결과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방문자 여러분의 학업에
무궁한 발전이 있으시고
모든일 만사형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1장. 갑오개혁과 근대적 교육제도의 도입
1. 갑오개혁 [甲午改革]
2. 교육개혁의 전개
3. 교육개혁의 방향
1) 초등교육의 실시
2) 근대적 개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육성
3) 근대학교의 방향
2장. 갑오개혁기 교육정책
1. 학교에 대한 관리
2. 사립학교정책
3. 학사운영
3장. 갑오교육개혁에 대한 평가
1. 갑오교육개혁 실패의 교육내적 원인
1) 불분명한 교육개혁 이념 2) 교육의 출세 수단화
2. 갑오교육개혁기의 교육사적 의의
4장. 개화기(1894~1910)의 민족교육운동
1. 개화기 민족교육운동의 방향
2. 민족교육운동 세력의 유형
1) 반봉건 및 반외세 지향 세력
2) 반외세 지향세력
5장. 개화기의 민족사학
1. 민족사학의 성격
1) 개화사상과 민족주의적 성격 2) 독립운동
3) 실학사상의 승계 4) 설립이념
5) 중등학교 중심
2. 원산학사 [元山學舍]
1) 원산학사의 설립(1883)
2) 원산학사의 성격
3. 구한말의 교육
4. 민족사학의 전개
1) 흥화학교(1895)2) 점진학교(1899)
3) 보성전문학교(1905) 4) 엄주익의 양정의숙(1905)
5) 일제의 탄압
6장. 교육구국운동
1. 교육구국운동의 의미
2. 사립학교 설립운동의 주도 세력
1) 애국지사들
2) 일반민중들
3) 교원
3. 학회의 교육구국운동
1) 애국운동단체의 교육운동
2) 교육운동의 방향
4. 교육구국운동의 교육내용
1) 민족 사학의 교육목적 2) 교육내용
3) 창가 교육
7장. 근대의 교육사상가
1 남궁억(1863~1939)
1) 교육목적 2) 교육 내용
3) 민족의식 고취 노력
4) 노작교육을 통한 실업 교육
2. 이승훈(1864~1930)
1) 교육의 목적 2) 오산학교(1907) 설립
3. 안창호(1878~1938)
1)생애2)도산의 사상
3)건전한 인격의 세 가지 요소
(1)건전한 인격은 먼저 덕성을 지녀야 한다.
(2) 건전한 인격은 생산적 직업인이라야 한다.
(3)튼튼한 신체를 강조했다.
4) 인격의 개조 뿐 아니라 민족성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5)교육이념
6) 교육목적 7) 교육 내용
8) 교육방법 9) 4대 정신
10)흥사단 [興士團]
7장. 일제 민족저항시기의 교육
1. 일제의 민족말살 교육정책
2. 일제하 민족교육
1) 서 당 2) 기독교계 사립학교
3) 민간 사립학교
3. 동네야학과 문맹퇴치
4. 각급 학교
1) 유 치 원(幼稚園)
2)초등학교와 초등교육
본문내용
1. 갑오개혁 [甲午改革]
1894년(고종 31)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봉기한 반봉건·외세배척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한 가운데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는 청 ·일 양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청은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청의 거절로 회담은 결렬되었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의 결과 조선에서의 청의 종주권(宗主權)은 부인되었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전적으로 인정해 주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청국의 조선에 대한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침략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확립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 의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894년 7월부터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어 제1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김홍집·김윤식(金允植)·김가진(金嘉鎭) 등 17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이 설치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