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회의 민권투쟁
- 최초 등록일
- 2010.11.16
- 최종 저작일
-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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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가 직접 쓴 것이므로 믿을 수 있습니다
목차
Ⅰ. 로마의 공화정으로의 배경
Ⅱ. 로마의 민권투쟁
본문내용
Ⅰ. 로마의 공화정으로의 배경
1) 로마의 탄생
전쟁의신 마르스(아레스)와 신관 레아실비아 사이에서 출생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테베레 강에 버려지게 되고 늑대에 의해 구출되어 늑대와 함께 생활하고 후에 도시 국가 로마를 세우게 된다. 오늘날에도 로마 한복판 카피톨 광장에 ‘늑대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라는 이름을 가진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초기의 로마는 왕정이었는데 로물루스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3대의 왕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정을 채택하였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2) 에트루리아로부터의 독립 - 공화정 수립
에트루리아로부터 독립을 한 로마는 이전의 왕정에서 벗어나 왕이 없는 나라. 즉 공화정을 로마의 정치 체제로 선포한다. 초기의 공화정은 귀족중에서 2명의 콘술(집정관,정무관)을 선출하여 1년동안 로마를 통치하게 하고 또 300명의 귀족을 선출하여 오늘날의 국회인 원로원을 창설하였다. 이러한 체제의 초기 공화정은 아테네의 귀족정과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공화정
*원로원 - 일반적으로 로마의 공화정을 만들어 낸 정치혁명의 장본인은 귀족계급이었다. 그들의 실권을 실제로 움직인 것은 장로회의로 시작된 원로원이었다. 그들은 처음 씨족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임기는 종신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집정관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집정관의 협의에 응하는 기관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공화정의 최고권력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의원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초기에는 대체로 300명 정도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