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

등록일 2002.06.10 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500원

소개글

조금이나마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목차

《20》'1946년 대구 10·1사건'은 '폭동'인가, '항쟁'인가?
《21》'닫힌 마음'에서 다시 '열린 마음'으로
《정치적 사건·인물 조사》
①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
②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 (建國準備慶北治安維持會)
③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朝鮮建國準備委員會)
④ 조병옥(趙炳玉)[1894.2.15~1960.2.10]
⑤ 대구 10·1사건
⑥ 조봉암(曺奉岩)[1898~1959]
⑦ 4 ·19혁명(四一九革命)
⑧ 이효상(李孝祥)[1906.1.4~1989.6.18] : 교육자·정치가·시인
《맺음말》

본문내용

《20》'1946년 대구 10·1사건'은 '폭동'인가, '항쟁'인가?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에 대구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하고 해방의 기쁨을 맞볼 시간도 없이 건국 준비에 돌입한다. 일제 식민지 지배구조와 낡은 봉건적 유산을 타파하고 자주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당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건국준비위원회'와 '경북치안유지회'로 분열되어 대립되었던 좌·우익 세력들은 협의 끝에 통합을 결정하고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하여 건국을 위한 기초 준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남한 유일정부임을 내세운 미군정 당국이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고, 친일 관료들을 군정관리로 임명함과 동시에 상황이 바뀌었다. 미군정의 힘을 등에 업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악행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에, 서로 정치적 성향이 달랐으나 타지역과 달리 타협하는 유연성을 갖고 있던 대구의 좌·우 세력은 협력하여 '대구공동위원회'라는 공동조직을 구성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과는 달리 나라 상황은 점점 더 민족국가 수립에의 희망과는 멀어져갔다.

참고 자료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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