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관요 조선 백자 예술
- 최초 등록일
- 2010.11.07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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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기도 광주 관요 조선백자 예술 광주 우산리 중심으로 다양한 사진자료 ppt
목차
1. 머 리 말
2. 광주 우산리 발굴유물 및 도편 특징
(관요설치 이전시기 관요 설치 이후시기)
3. 광주 우산리 백자요지
4. 조선 전기 명품 도자기
5. 맺 음 말
본문내용
광주분원(廣州分院) 광주는 조선시대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어 운영되던 유서 깊은 도자기의 고장이다.
분원이란 말은 왕실의 어기와 관청에 공납하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사옹원에서 어기제조 및 공납을 맡은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태조1년(1392)에 사선서를 설치했다가 사옹방으로 그리고 세조 13년(1469) 사옹원으로 개칭하여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먼저 광주의 분원 즉, 관요 설치 이전시기와 이후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관요 설치 이전 시기는 조선이 개국하는 1392년부터 관요가 설치되는 시기인 1467년경까지이다. 이 시기의 광주지역 가마에서는 지방과 달리 관사명이 있는 분청사기가 제작되지 않으며 빠르게 백자 제작전용가마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1430년대부터 관요설치이전까지로 유물에서 보이는 특징은 ‘王, 殿, 中 , 仁, 二, 三’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 역삼각형굽의 백자, 청자가 등장하여 갑발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명나라 백자와 청화백자의 기술적 영향을 받아 역삼각형굽의 양질백자, 청자와 갑발의 사용이 가능하였고, 이러한 기술적 배경 하에 분원이 설치되고 양질백자생산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관요 설치 이후 시기는 분원 운영 이후에서 임진왜란까지(1467~1592년경) 운영된 가마에서 발견되는 백자편에는 ‘天, 地, 玄, 黃’과 ‘左, 右’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그리고 대부분 갑발을 이용하여 제작한 양질의 역삼각형굽의 백자에만 명문이 있고, 이와 함께 죽절굽의 태토빚음눈을 한 조질 백자가 상번을 한 상태로 발견되며, 청자가 역삼각형굽에 가는 모래받침을 한 모습으로 소량으로 나타난다.
광주 분원 즉, 관요의 설치이전시기와 이후시기에 나타나는 차이를 광주 우산리에서 출토된 도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광주 우산리 백자요지와 우산리 활동시기인 조선전기의 명품 도자기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강경숙, 『한국도자기 가마터 연구』, 시공아트, 2005/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경기도 박물관, 『경기도 광주 관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