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과 김옥균
- 최초 등록일
- 2010.11.05
- 최종 저작일
- 2010.09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없음
본문내용
근현대사에 대한 인물에 대한 토론형식을 쓰는 과제를 보고, 어떤 대립되는 인물들을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는데, 일반적으로 근현대사를 대원군 이후로 보기 때문에 대원군 이후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의 분열이 있었던 그 사건에서 중심 인물인 온건 개화파(수구당, 사대당)의 김윤식과 급진 개화파(개화당, 독립당)의 김옥균에 대해서 쓰기로 마음먹고 문헌들을 조사하여 토론 형식의 보고서를 쓰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물에 대해 알아보았다
▷ 온건 개화파의 김윤식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원군으로 김옥균 등 개화파를 제거하였고, 병조판서가 되고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1885년 거문도사건을 처리하였다.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 민영익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다가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면천에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시작된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그의 천거로 외무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죽고 친러파 내각이 들어서자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를 미리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을 받았다. 이일로 1897년 12월 20일 고종의 명으로 제주도에 종신토록 유배되었다. 천주교 신자 토벌사건으로 1901년 다시 전라도 지도로 이배되었다가 유배생활 10년만인 1907년 송병준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중추원의장으로 발탁되고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병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불가불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작위는 주군(순종)의 명으로 받았다고 해명했다.
1916년 경학원의 대재학이 되었으며 흥사단 ·대동학회 ·기호학회를 조직하고 대종교 창시자
참고 자료
김옥균, 김윤식 인물정보 : 네이버 백과사전
통합한국사 :정재준 저
국정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