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개항
- 최초 등록일
- 2010.10.09
- 최종 저작일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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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천개항에 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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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인천은 1876년에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76년의 부산, 1880년의 원산에 이어1883년에 세 번째로 개항되었다. 개항한 순서로만 본다면 가장 늦지만 이것이 인천의 중요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항이 늦어진 것은 오히려 수도서울의 배후지로서 인천이 가진 군사적, 정치적인 중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인천은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과 제물포로 혼칭되어왔다. 즉 제물포는 협의적 공간인 개항장과 광의적 공간인 인천을 모두 통칭해 왔다. 인천은 지속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수반하여 시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인천광역시사>편찬자들은 ‘인천지역’,‘구인천’,‘원인천’또는‘인천’등으로 인천의 공간적 개념을 확정하였다. 이것은 광활한 인천을 보다 용이하게 표현하려는 방편이지만 여기에는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의 변화에 대한 역사성이 결여되어있다.) /제물포의 개항은 한국사에서 봉건군주국인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체젤 편입되고 아서구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되는 전사에 해당한다. 제물포 개항을 둘러싸고 약 2년간 진행된 개항 협상이 첨예한 대결의 양상을 띤 것은 그러한 역사적 변곡점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측의 입장에서 제물포 개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사 시켜야 할 과업이었다. 이 당시 일본은 제물포가 물자를 싣고 내리기에 최적의 장소 이며 서울의 경제에 이득이 대단히 클 것이라는 경제 논리로 협상에 임했다. 이에 대해 조선측은 제물포는 ‘해문요충’이자 ‘보장중지’ 이므로 개항장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나 이 협상은 회담 시작 20개월만인 1881년 2월 28일(고종 18년)에 완전 타결되어 1883년 1월1일을 기하여 제물포를 개항한다는 일본측의 주장에 동의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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