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답사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0.09.23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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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용주사에 대한 연혁 및 관련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였습니다.
관련 사료와 사진 또한 다양하게 첨부되어 있습니다.
해당 교수님께 몇번 검토를 받았던 자료이기 때문에
사료 면이나 사진 구성 등에서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레포트 쓰실 때 많이 이용하세요~
목차
1. 개관
2. 가람배치
3. 문화재
참고문헌
본문내용
1. 개관
용주사는 본래 이름이 갈양사(葛陽寺)로 854년(문성왕 16)에 창건되었다. 970년(고려 광종 21)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는 등 이름 높은 도량에 속했으니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폐사된 체 방치되었다. 그러다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지금의 융릉에 옮기면서 다시 일으켜 세운 사찰이다. 비명에 숨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능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불교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시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용주사라는 이름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었으며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전국 5규정소(糾正所) 중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했다. 또한 이 절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고 이 절의 재건의 총 책임자였던 보경당(寶鏡堂)이라는 승려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 되기까지는 보경당의 노력이 컸다. 보경당은 융릉의 이장할 장소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대황리에 머물며
참고 자료
조미혜 김용기, 「용주사의 능침사찰적 특징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