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신라봉평비에 관한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0.09.18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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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 시간에 금석문중 택1하여 논문쓰기 과제가 있었습니다.
울진신라봉평비를 선택하여 조사했습니다.
목차
1. 봉평신라비개관
2. 비의 현황
3. 건립년대와 성격
4. 원문
5. 해석
6. 주목할점
7. 참고문헌
본문내용
신라 6부 대표가 소를 잡에 제사를 하니 여기에 참가한 이들은 탁부 내사지 나마, 사탁부 일등지 나마 및 남차야족지, 탁부 빗루야족지, 거벌모라도사(=행정촌에 파견된 지방관), 졸파 소사세지, 실지도사 오루차 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 니모리 일벌, 의지, 파단지, 사리일지, 일전지 아척, 아대혜촌 사인 나이리에게 곤장 60대를, 갈시조촌 사인 나이리 거척, 남미지촌 사인 이, 어즉근리에게 곤장 100대를 쳤다.
실지군주 달부 이부지 나마의 감독 아래 이 비석을 세우니, 글을 쓴 이는 모진 사리공 길지지, 사탁부 약문 길지지이며 조각한 이는 탁부 술도 소오제지, 사탁부 모리지 소오제지이다. 비를 세우는 사람 탁부 박사는 이때에 ‘만약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하늘로부터 죄를 얻을 것’이라고 교하였다. 거벌모라 이지파 하간지, 신일지 일척은 모두 398명을 거느리고 이 비를 세우는 노역을 담당하였다.
6. 주목할 점
1) 부보다는 관등 : 503년에 건립되었던 냉수리비 단계만 해도 주요 인물들은 관등 순이 아니라 부별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21년 후에 세워진 봉평비에서는 소속부의 여부보다는 관등의 고위 여하에 따른 순서로 기재되고 있다. 전대에 비해 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관등체계가 실효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권도 강화되었을 것이다.
2) 외위 신라 때에 지방민에게 주던 관등
의 존재 : 우리가 익히 아는 신라의 17관등체계는 왕경인, 즉 서라벌 지역 출신들에게 내려지던 경위이다. 고대 신라는 왕경인과 지방민의 차별이 유독 심했다. 차별을 넘어 지방민에 대해서는 외위를 수여할 정도 였다. 이 외위가 확실히 소멸되는 것은 중대의 일이고 봉평비 건립단계에는 외위가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3) 노인, 그리고 노인법 : 노인이란 새롭게 신라영토로 편입된 변방의 주민으로 파악한 견해(주보돈), 집단예민과 같은 피복속민으로 보는 견해(노태돈), 신라육부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신라지배 하의 지방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김재홍) 등이 있는데, 왕경이 아닌 지방민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법흥왕 대에는 왕경인들과 울진쪽 지역인들을 구별하여 차별하고 이들에 대해서면 적용되는 법이 있었는게 그것이 바로 비문에 나오는 노인법이다.
참고 자료
한국고대사연구 2-울진봉평신라비특집호(한국고대사연구회, 1989)
울진봉평신라비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88)
자료소개-울진봉평비 길선과 아도비 길승(김태식,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