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출산문화
- 최초 등록일
- 2010.08.11
- 최종 저작일
- 2009.03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1. 들어가는 말
출산의례는 한 개인의 생이 시작되는 의례로서 통과의례의 첫 번째 과정으로 전통사회에서 혼인은 자녀 출산의 수단으로 여겼으며 혼인한 여성은 아이를 낳는 일을 가장 큰 의무인 동시에 소망으로 생각하였다. 또 이 일을 당사자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문중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였으며 가계를 계승할 수 있는 아들을 낳는 것이 중요한 효도의 한 가지였다.
조선조에서는 아들을 낳아야만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알았고 심지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은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한 가지를 어긴 것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따라서 신부를 고를 때 성품이나 외모 외에 아이, 특히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는가를 미리 알아보기도 하였는데 이때 여성은 임심할 수 있는 기간을 헤아리는 교육을 미리 받고, 혼인 후에도 이를 신랑에게 알려서 합방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있어 출산은 중요한 일이었으며 특히 왕실의 출산은 왕조의 명운을 짊어질 왕위 계승자를 잇는 중요한 의식이었으므로 민간과는 달리 독특한 왕실문화를 조성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민간의 출산문화와 같지만 다른 조선왕실의 출산문화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그 과정을 추측해보고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왕실의 태교
3. 출산전담기관 - 산실청(産室廳)과 호산청(護産廳)
4. 원자의 탄생과 출산문화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출산의례는 한 개인의 생이 시작되는 의례로서 통과의례의 첫 번째 과정으로 전통사회에서 혼인은 자녀 출산의 수단으로 여겼으며 혼인한 여성은 아이를 낳는 일을 가장 큰 의무인 동시에 소망으로 생각하였다. 또 이 일을 당사자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문중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였으며 가계를 계승할 수 있는 아들을 낳는 것이 중요한 효도의 한 가지였다.
조선조에서는 아들을 낳아야만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알았고 심지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은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한 가지를 어긴 것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따라서 신부를 고를 때 성품이나 외모 외에 아이, 특히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는가를 미리 알아보기도 하였는데 이때 여성은 임심할 수 있는 기간을 헤아리는 교육을 미리 받고, 혼인 후에도 이를 신랑에게 알려서 합방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있어 출산은 중요한 일이었으며 특히 왕실의 출산은 왕조의 명운을 짊어질 왕위 계승자를 잇는 중요한 의식이었으므로 민간과는 달리 독특한 왕실문화를 조성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민간의 출산문화와 같지만 다른 조선왕실의 출산문화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그 과정을 추측해보고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왕실의 태교
천재일우의 기회로 왕비나 후궁이 잉태를 하면 그것은 왕실을 넘어서 나라 전체의 크나큰 경사였다. 잉태 소식을 들은 국왕은 임신부의 공을 치하하고 그 처소의 내관, 상궁, 나인들에게까지 후한 상을 내렸다. 임신부를 잘 보좌해달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임신부는 왕실의 극진한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태교에 주력하였다. 이때 왕실의 바람은 왕자가 태어나는 것이었다. 임신부의 소망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일차적인 소임은 왕자를 생산하여 국왕의 자손을 번영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중대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서 행해진 왕실의 태교는 본래의 교육적 의미보다, ‘기자신앙’에 가까웠다.
참고 자료
- 김문식, 궁중의 출산과 태실, 전통과 현대 15
- 김호, 조선후기 왕실의 출산풍경(조선의 정치와 생활), 집문당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편, 조선왕실의 출산문화, 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