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그는 과연 패배자인가
- 최초 등록일
- 2010.06.23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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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에 대해
쓴 레포트
목차
1. 서론
2. 광해군은 누구인가?
3. 왕세자로서의 임진왜란과 분조활동
4. 광해군의 험난한 즉위길
5. 광해군과 북인
6. 광해군과 궁궐
7. 외교전문가 광해군
8. 결론
9.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렸을 적에 드라마 ‘서궁’을 재밌게 본 적이 있다. 드라마는 광해군이 인목대비에게의 패륜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면서 인목대비 관점에서 전개가 되었다. 어릴 적에 충, 효, 예를 배우던 나로서는 광해군의 처사가 이해가 가지 않았고 당연히 인목대비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친 아들인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당하다가 죽는 걸 보면서 여인의 한을 배웠었다. 결국에는 인조반정을 통해 인목대비가 승자가 되면서 드라마는 끝나게 된다.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 경제난 속에서 경쟁을 통해서 1등만이 살아 남는 이런 시대 속에 솔직히 광해군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다. 쿠데타를 만나 왕위를 빼앗기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폭군’이니 ‘패륜아’라고 불리우던 광해군이었다. 조선 후기까지도 광해군은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이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반정(反正)은 『춘추(春秋)』『사기(史記)』등에서 유래하는데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撥亂世反諸正)”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 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 상황은 결국 ‘부정(不正)’일 수밖에 없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와 역사적 복권은 20세기에 들어와 이루어졌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과서와 개설서에서는 그를 더 이상 ‘폭군’이나 ‘혼군’으로 매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17세기 초반 명․청 교체기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이른바 ‘중립외교’, ‘실리외교’를 통해 명과 청,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했던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찬양된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열강의 입김 아래 헤매고 있는 오늘의 우리 처지를 반영하여, 그는 우리 역사상 몇 안되는 ‘외교전문가’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런 긍정적 평가는 1958년 발표된 이병도의 논문 「광해군의 대후금정책」,『국사상의 제문제』
이었다. 그 이후로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