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중심으로 본 동아시아 각국간의 관계
- 최초 등록일
- 2010.06.10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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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와 당, 일본, 신라의 관계를 통해 그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파악하고, 현재 외교적으로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 적용해보았습니다.
목차
1. 서론
2. 발해와 당
3. 발해와 일본
4. 발해와 신라
5.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옛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흥운동의 불씨는 오래가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국가는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 옛 고구려 땅에 자리 잡은 발해였다.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당의 위에서 눈엣가시 역할을 톡톡히 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해동성국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시대를 풍미했던 발해에게서 주목할 만한 점은 정치와 외교적인 측면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돋보였다는 것이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강대국 당을 상대로 기죽지 않는 강한 외교를 보이다가도 때로는 유연한 대처를 보이며 외교에 있어서 능수능란함을 과시했다. 이는 신라와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발해의 모습은 외교에 있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또한 발해는 국가의 성격에 있어 각국의 주장이 모두 다르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에 따라 중국 동북의 지방왕조로, 남북한에서는 고구려의 후예, 러시아에서는 북방 유목민족의 국가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교육이나 인식에 있어서는 발해의 존재는 그리 크게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비어있던 옛 고구려 땅에 자리잡았던 발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큰 구멍이 생겨버리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뒤를 이어서 강할 때는 강하게, 부드러울 때는 부드럽게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어나가며 동아시아에 확실히 그 존재를 인식시켰던 발해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외교의 변화와 관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발해와 당
당은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의 기틀을 닦기 이전부터 고구려 유민의 반당 투쟁을 분쇄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책동하였으며 발해의 건국 후에도 이러한 책동은 계속 나타났다.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여러 번 혼쭐이 난 경험이 있는 당은 과거 고구려의 주요 지역이었던 평양성, 요동, 국내성, 부여성 지역의 주민을 당 내륙으로 강제 이주 시키는 등 고구려가 새로운 국가체로 태어날 수 없도록 많은 견제를 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조영은 고구려의 주된 무대라고는 할 수 없는 송화강 너머의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자료
발해고: 잊혀진 제국, 발해를 찾아서, 유득공, 서해문집
발해사2 발해의 정치, 서병국, 한국학술정보
발해의 대외관계사, 한규철, 신서원
발해정치외교사, 김종복, 일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