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전자-인켈(실패사례)
- 최초 등록일
- 2010.06.04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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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① 개요
② 해태제과 그룹의 몰락
③ 회생을 위한 노력
④ 첫 번째 매각 추진
⑤ 실패 원인
⑥ 관련 기사
■ 청산가치보다 3배 높은 가격에 매각
■기업가치가 구조조정의 핵심
목차
① 개요
② 해태제과 그룹의 몰락
③ 회생을 위한 노력
④ 첫 번째 매각 추진
⑤ 실패 원인
⑥ 관련 기사
■ 청산가치보다 3배 높은 가격에 매각
■기업가치가 구조조정의 핵심
본문내용
① 개요
해태그룹은 1997년 부도로 침몰하기 전 까지만 하여도 해태제과를 모기업으로 총 15개의 계열사에 1만4천여 명의 임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1996년 말 기준으로 자산총액 3조3천9백 여억 원, 매출액 2조7천1백 여억 원으로 재계 24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모기업인 해태제과는 지난 1945년 해방되기 전의 `영강 제과`를 이 회사에서 근무하던 朴炳圭, 閔厚植, 申德本, 韓達成 4인이 불하받아 `해태제과 합명회사`로 탄생시킨 해방 동이 기업이다. 현재 서울 용산구 남영동 131번지에 있는 해태제과 식품의 사옥도 영강 제과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해태제과는 초기에 `해태 카라멜`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 후 카라멜과 웨하스, 제리, 풍선껌 등으로 50-60년대를 풍미하고, 70년대에는 식품업계 불후의 명품인 부라보콘, 맛동산을 탄생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해태제과는 1973년 해태음료㈜, 78년 해태상사㈜, 79년 해태전자㈜를 설립하여 사업부문을 다각화했는데 이는 67년 롯데가 등장, 제과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다른 부문에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77년 朴炳圭 회장이 타계하자 1981년 3인 동거체제는 끝이 나고 박병규 회장의 아들인 朴健培 회장이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로 해태 제과. 음료. 상사 등 3개사를 맡아 1997년 부도로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 이끌어왔다. 해태그룹은 81년 코래드, 82년 해태타이거즈와 해태유통을 잇달아 설립했으며 90년 해태제과 내에 건설사업부를 설립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