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의 실리외교에 관한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0.05.31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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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외교론 기말 논문입니다.
목차
Ⅰ. 서론
1.박정희 정부의 실리외교에 관한 개관
Ⅱ. 본론
1.대미 자주외교와 실리외교
(1)베트남파병
(2)한일국교정상화
(3)한독고용계약
2.한강의 기적
Ⅲ.결론
1.박정희 정부의 실리외교에 관한 재평가 및 고찰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박정희 정부의 실리외교에 관한 개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래 열일곱 번의 대선이 치러졌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중에 박정희대통령 만큼 극과극의 평가를 받은 이는 드물다. 무엇보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1960년대 정권을 잡기시작하면서 엄청난 경제부흥을 일으킨 국가발전의 선봉자, 경제발전을 이유로 많은 국민들을 속박하고 심지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다 목숨을 앗는 잔인함을 가졌던 독재자. 그러한 논쟁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당시 이루어진 박정희 정부의 외교였다. 현재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베트남 파병, 한일국교정상화, 한독고용계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한국과 미국 간의 외교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큰 판도를 엎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부터 자주외교를 주장해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박정희 정부가 대한민국 정권을 잡기위한 이렇다 할 정당성을 확보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그런 정당성 확보의 기반의 일환으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꾀함에 자본 확보는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러나 1960년대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67달러 수준이었다. 외환 보유고도 23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무역수지도 3300만 달러, 수입 3억 4400만 달러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대금 지급은 2억 3200만 달러가 원조 자금일 정도로 원조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실업률은 23%에 달했고, 물가상승률은 무려 42% 수준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결과도 얻어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1971년 3월 제7사단을 빼내가고 ‘5년 내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를 내세우자, 그 뒤부터는 바로 자주국방, 즉 자주외교를 내세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