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를 통해본 로마사회의 구조
- 최초 등록일
- 2010.05.30
- 최종 저작일
- 2010.04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노예제를 통해서 본 로마사회의 구조
초기 노예제와 노예제의 확산 시기를 알아보고
그후 노예 경제시대에 세부적인 사항을 알아본다
목차
1. 초기 노예제 : 왕정초기부터 기원전5세기까지
2. 노예제의 확산 : 공화정 중기 (B.C. 264~ 133)
3. 노예 경제 시대 :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제정 초기까지
1) 노예 공급
2) 노예의 일과 처우
3) 노예 반항방법
4. 맺음말
본문내용
도시 로마를 창건한 로물루스(Romulus)가 취하였다는 정책은 왕정 초기의 노예제와 관련하여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는 정복전쟁을 통해 장악한 도시들의 성년 남자들을 죽이지 말도록 하였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그는 정복한 도시들에 로마 식민시들을 건설하였으며 일부 주민에게는 로마시민권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주민의 수가 부족하자 카피톨리움 언덕의 한 신전 피난소를 인근 도시의 주민들에게 개방하였고 거기에는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어떤 외국인도 도피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아마도 초기에 로마의 인구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인구수를 늘릴려는 정책으로 느껴진다.
초기의 가부장제적 사회에서는 소수의 유력한 귀족들이 숫적으로 많지 않은 노예들을 소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예는 가부장(pater familias)의 가정(familia)의 구성원이 되었다. 노예는 가부장의 절대적 권한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노예들이 주인의 가족공동체 일원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므로 이 시기의 노예제는 흔히 가부장제적이며 가내적 성격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무엇보다 노예가 주인의 가정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주인과 함께 살면서 주인에게 봉사하고 주인과 함께 일하는 것은 분명히 주인과 노예간의 인간적이고 온정적인 관계형성에 유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는 법적으로 주인의 재산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으로 주인과 노예간의 관계는 온정적인 특성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로마의 제 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선대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노예출신으로 그가 영리하고 영민하여 왕의 딸과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당시 노예에 대한 선입견이라 든지 선입관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처럼 이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노예가 생산 활동에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때는 주로 부채노예나 클리엔테스에 의한 생산 활동이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 자료
김진경 외 지음.『서양고대사강의』.한울. 2004
Bradley, K.R.『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신서원. 200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