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정치사] 8.15 광복의 아픔에 대해

등록일 2002.05.09 MS 워드 (doc) | 4페이지 | 가격 500원

목차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방송을 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9월14일 경성을 서울특별자유시로 지정하고, 주석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12월 27일 신탁통치 발표.
1946년 1월 14일 태극기 게양식이 있었다.
3월 1일 기념식을 좌익 우익은 남산과 보신각에서 각각 치뤘다.
토지개혁으로 인해 남한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려왔다..
해방후1년 2백여만명이 증가했다. 실업률은 최대를 기록했다.

★ 결론 ★

본문내용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방송을 했다. 대부분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인 16일에 전국민이 알게되어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태극기가 없는 사람들은 일장기에 청색을 그려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다녔다. 그리고 나서 일장기를 태우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태극기를 만들었다. 정치중심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미군에 접근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통역관 기자관등 극소수였다. 미국은 인천 시민들의 외출을 막았다. 환영나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넘어오려 하자 일본군이 두명을 사살했다. 미군의 존재는 반가웠지만 일본에 대한 불안감을 감출수 없었다.
9월 9일 일장이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개양되면서, 미군정 시기가 개막된 것이다.
일본군 무장해제. 일본군은 미국에게 총기를 양도했다. 미군의 감독하에 일본군이 직접 무기들을(대포등) 제주도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또 탱크는 폭파시켰다.

참고 자료

8.15광복 비디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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