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
- 최초 등록일
- 2010.04.16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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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정리
목차
서론
본론
1. 발해 유민 후예의 사례분석
①유충정
②대수정
③대집성과 대집성의 녀
④대금취
2. 발해 유민 후예의 사회적 지위
결론
본문내용
본론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내투하였다. 이들 제 내투민에 대한 처우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발해 유민을 중심에 두고 살펴보려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려시대 내에 발해 유민의 위치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발해인의 고려 내투는 태조 8년(925)발해장군 신덕 등 500인이 내투한 것이 처음이다. 이때는 발해가 망하기 4개월 전이므로 국가 내부의 문제와 거란의 침공으로 국망을 예견하고 남쪽의 고려로 내투하였을 것이다. 발해유민 내투의 마지막은 금에 의한 대발해 진압과 관련된 예종12년(1117)1월 발해 52인이 내투한 사례이다.
발해 유민의 고려 내투는 발해 멸망 직후와 경종 4년(979) 발해 유민의 활동으로 추정되는 어느 사건, 홍료국이 붕괴된 1030년 직후, 대발해의 소멸시기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10~12세기 당시 동아시아 내의 발해와 발해 유민의 활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1. 발해 유민 후예의 사례분석
위의 고려 내투민들이 달리 고려시대에 활약한 발해 계통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발해 유민 후예’ 또는 ‘발해 유민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넓은 범주로 보면 발해 유민으로 칭할 수 있으나, 좁혀서 보면 분명히 발해 유민과는 다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발해 유민 후예’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고려로 내투한 발해 유민은 수만에 이른다
결론
발해 유민 후예들은 고려 말고 어디서든 다른 민족에 흡수되어 더욱더 많은 활약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이 과제를 하면서 상당히 어려웠다. 역사를 특히 발해의 역사가 너무 생소할 뿐만 아니라 한문의 해석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이 과제를 느낀 점은 국립도서관을 방문했는데 그 넓고 큰 도서관에 우리의 역사가 침해되고 있는 북방사에 관한 자료는 2층 한구석에 초라하게 방치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총 보관 도서가 몇 만권이 되는 우리나라 도서관에서 발해의 자료는 단 몇 권에 불구하고 거기에 유민자료는 정말 몇 권도 안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과제를 하면서 너무 부담을 갖고 시작해서 그런지 주제와는 약간 빗나간 부분이 있는 거 같다. 하지만 발제문과 겹치는 바람에 더욱더 많은 사실을 알고 공부하게된 거 같다. 이러한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