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
- 최초 등록일
- 2010.04.05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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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표자료로 A뿔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항일무장투쟁의 배경
본론
1. 최초의 항일무장투쟁운동 (대한광복단)
2.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
3.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4. 1940년대 항일무장투쟁 (한국광복군)
결론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Ⅰ.서론
1. 항일무장투쟁운동의 배경과 시작
일제의 조선침략에 대한 무장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인 ` 독립전쟁론`은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마련되었다. 조선지배 야욕을 더욱 노골화했던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2가지 조류로 전개되었다. 원래 독립전쟁론은 1905년을 전후한 반일의병운동에서 출발했으나,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내에서도 점차 2가지 노선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준비론`(실력양성론)이고, 다른 하나는 신채호·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전쟁론`이었다.
이처럼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이미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거의 절망적이었던 1909년 봄부터 남만주지역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와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독립군이 국내로 진공하고 동시에 국내에서는 이에 호응, 일거에 봉기해 무력항쟁으로 국권회복을 한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1911년 류허 현싼위안푸에서 경학사를 창건하고, 신흥강습소를 개설했다. 경학사는 1912년에 부민단으로 발전해 근거지를 퉁하 현 하니허로 옮겼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로 발전했다. 경학사(부민단)는 191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가 되었으며, 신흥강습소는 실질적인 무관학교로서 이후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다. 한편 합병을 전후한 2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토벌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의병출신들도 점차 남만주·북만주, 혹은 노령 연해주지역으로 옮겨와 많은 무장단체들을 조직했다. 1919년의 3·1운동은 이러한 무장독립단체들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에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확실한 한계를 깨달은 수많은 단체들은 점차 보다 큰 단체로 발전했다. 남만주지역에서는 대한독립단(1919. 3)·대한청년연합회(1919. 4)·서로군정서(1919. 4, 임정직할)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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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우, 대동. 항일무장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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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군의 피맺힌 역사,‘한국 광복군’ 탄생이 있기까지- 한국광복군 관련 블로그
http://www.kwangbokd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