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품은 테헤란로
- 최초 등록일
- 2010.04.04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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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테헤란로에 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Ⅰ.테헤란로 지명의 유례
Ⅱ.90년대 새로운 업무중심지로 성장
Ⅲ. 90년대 말 벤처열풍과 테헤란로
Ⅳ. 화이트칼러들의 꿈, 희망, 탄식이 어울러진 공간으로서의 테헤란로
본문내용
Ⅰ.테헤란로 지명의 유례
테헤란로의 기원은 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남의 한 거리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이 붙은 엇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때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1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크게 휘청거렸는데 이때 중동 국가와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 서울시는 77년 6월 이란의 테헤란 시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이를 기념해 당시 서울을 방문한 테헤란 시장이 두 도시의 도로이름을 교환할 것을 건의했다. 서울시는 테헤란 시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당시‘삼릉로’로 불리던 거리를 ‘테헤란로’로 고쳤다. 구획 상으로는 강남구 역삼동 825의 15(강남대로)부터 잠실동50(삼성교)까지의 폭 50m, 총 연장 4km의 도로를 말한다.
이것이 테헤란로의 모태이며 이후 벤처기업이 몰리면서 미국 실리콘 밸리에 빗대어 테헤란 밸리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이란 테헤란 시에도 ‘서울 스트리트’가 있다. 테헤란 북부 국제 전시장 인근 ‘바낙 스트리트’북단에서 북쪽 방향으로 ‘닥터 참란’고속도로 교차점까지 3km의 구간이 그것이다. 이란의 대표 여행 명소로 소개되는 서울 스트리트는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고 도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는 평이다.
하지만 테헤란로는 벤처기업이 몰리면서 지명과 관련해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99년 12월 한글과컴퓨터 등 국내 19
Ⅳ. 화이트칼러들의 꿈, 희망, 탄식이 어울러진 공간으로서의 테헤란로
2001년 리타워텍의 주가 조작 사건, 정현준 게이트를 비롯한 각종 비리의 파장이 테헤란로에 퍼졌다. 당시 테헤란로엔 상당수의 자금이 정치권의 검은 돈이라는 말이 파다했다.
벤처 광풍이 휩쓸고 간 테헤란 밸리에 위기의 찬바람이 불었다. ‘위기설’은 2001년에도 있었지만 그 심각성은 해마다 심각해졌다. 중소기업청의 통계를 보면 벤처 수는 2001년 12월까지만 해도 한 달에 500개씩 늘어났다. 그러나 2001년 12월을 정점으로 줄기 시작해 그 다음 해 1월에 106개, 2월 52개, 3월 176개가 줄었다.
본격적인 위기는 2002년 2분기부터 시작했다. 4월 319개, 5월 158개, 6월 399개, 7월 349개가 줄어든 것이다. 벤처기업 수는 중기청이 벤처기업 확인 업무를 시작한 지난 98년 5월부터 2001년 말까지 매월 평균 300-400개, 많게는 500-600개씩 늘어왔다.
이런 여세를 몰아 1만개를 돌파했던 벤처기업은 2002년 7월 9,833개로 1년 3개월만에 1만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사이 1,700여 벤처가 문을 닫았다. 이렇게 많은 화이트칼러들은 꿈과 희망을 뒤로 한 채 일단은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참고 자료
강병준(2003). “특명! 재도약 테헤란 밸리.” 서울: 로로M&B.
공태국. 2002. 호서대학교 벤처전문대학원 석사논문.“테헤란밸리의 벤처생태계에 關한 硏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