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 비문 논쟁과 임나일본부설
- 최초 등록일
- 2010.03.20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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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왕릉 비문 논쟁과 임나일본부설
목차
광개토왕릉비의 제작 및 발견
능비문의 왜 관계 기사
임나문제에 대한 제 학설
가야사 속의 안라왜신관
본문내용
광개토왕릉비의 제작 및 발견
광개토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391년에 왕위에 올라 412년까지 22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죽은지 2년 후인 414년 아들인 장수왕이 고구려 도성(중국 길림성 집안현) 근교의 능묘에 왕을 안장하고 그 앞에 6.39미터 높이의 거대한 응화암으로 능비를 세웠다.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고 668년에 고구려의 멸망이후 광개토왕비는 그 존재가 잊혀져갔다. 청나라는 백두산으로부터 이 지방 일대를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사람들의 거주와 통행을 금지하였다. 1876년 청나라가 이 지방에 회인현을 설치한 이후, 능비가 재발견되면서 1880년 전면의 이끼를 제거하고 첫 탁본이 만들어졌으나 묵수곽진본이었다. 1880년 중반에 북경의 금석학자들이 전문적 탁공인 이운종을 파견하여 50여 벌에 달하는 좋은 능비 탁본을 만들어 북경으로 돌아왔으나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일본의 참모본부는 1880년에 사코우 중위를 중국에 파견하여 133매의 종이로 이루어진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얻은 후 귀국시 참모본부에 제출하여 이 비문을 요코이를 비롯한 몇 명의 학자들이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하여 5년만에 1888년 최종판독문을 확정하고 회여록 5집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 내에서는 비문에 대한 연구논문이 줄을 이었는데 그 이유는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왜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격파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은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나오는 가라 등의 7국 평정 기사를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동경대 교수인 스에마츠는 1933년에 기존의 문헌고증적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남한경영론 즉 임나일본부설을 내놓게 되었고 , 패전 후인 1949년에는 이를 `임나흥망사`라는 단행본으로 증보하여 출판하였다. 그 설의 요점은 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을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데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발견되자마자 일본에게 악용되어 왜의 남한경영론이 정립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