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
- 최초 등록일
- 2010.03.19
- 최종 저작일
-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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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에 대한 소논문
목차
Ⅰ. 서론
Ⅱ. 신구교간의 갈등
1. 초기 갈등
2. 교리갈등
3. 문서논쟁
4. 교폐문제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한국이라는 하나의 선교의 장을 놓고 각각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교와 구교사이에는 자연히 갈등과 반목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적으로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하여 한국선교의 역사가 1세기나 앞섰으나, 자유스러운 선교활동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이후인 1890년대부터였다. 따라서 이 때부터 양측간에 본격적인 선교 경쟁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갈등과 충돌, 대립과 반목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Ⅰ』(서울: 기독교문사, 2008), 229.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은 로마가톨릭의 범행을 지적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후로 계속되어진 것이다. 실상 선교의 목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이들이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너무도 다른 교리문제로 인해 그들은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실상 개신교에서 이단이라 명하고 있는 천주교와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갈등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교리갈등, 문서논쟁, 교폐문제 등 다양한 문제와 형태로 그들은 한국 초기 선교때부터 여러 문제를 가져왔다.
본 연구를 통해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의 초기 형태들을 살펴보고 특별히 주를 이룬 교리논쟁, 문서논쟁, 교폐갈등을 통해 그 갈등의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현시점에서의 개신교의 과제를 살펴보자.
Ⅱ. 신구교간의 갈등
1. 초기 갈등
영아소동이 한국교회를 휩쓸고 지나가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888년 삼남 지방에 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심한 기근이 발생하자 각국 외교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 이듬해 “구호대책위원회” 가 결성되면서 신구교 상호간의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한 독일 상인이 천주교 블랑(Blance) 주교를 찾아와 구호금 1천 1백 불을 기부한 것을 계기로 1889년 구조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참고 자료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5.
신광철.『천주교와 개신교 만남과 갈등의 역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Ⅰ』. 서울: 기독교문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