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 사회의 변화
- 최초 등록일
- 2010.03.16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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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년전쟁의 원인과 백년전쟁의 과정등..
목차
∎백년전쟁의 원인
∎백년전쟁의 과정
∎백년전쟁 후의 프랑스
∎중세말의 영국
∎프랑스와 영국의 영토
본문내용
∎백년전쟁의 원인
백년전쟁의 원인은 프랑스에서의 발로아 왕조의 성립과 이에 관련된 왕위계승권 문제였다. 카페왕조는 오래 왕위를 누려왔으며 필립 4세는 후계자를 가지지 못하였다. 많은 논의 끝에 필립 4세의 동생의 아들인 바로아백이 필립 6세로서 왕위에 오르고 바로아 왕조가 성립케 되었다. 그러나 여자가 직접 왕위계승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다면 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의 아들이 왕위계승자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와 같은 문제 이외에 노르만디공의 영국정복이래 영국왕은 프랑스내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고, 역대 프랑스왕들은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여 양국 사이에는 언제나 전쟁과 대립이 그치지를 않았다. 바로 이 가스코뉴의 영유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의 문제는 분쟁과 대립의 씨앗이었다.
∎백년전쟁의 과정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은 프랑스는 인적, 물적 자원이 훨씬 유리하였다.
그러나 실제 쓸수 있는 재원은 서로 비슷하였다. 프랑스군의 핵심은 중무장을 한 봉건귀족의 기사가 그 핵심이었고 영국군의 경우는 봉건군대에 보태어 새로운 무기인 장궁을 가진 자영농민출신의 보병대가 실전의 경험을 가지고 참가하고 있었다. 최초의 큰 전투는 1346년의 크레시 전투이다. 한편 흑색 갑옷을 입고 출전하여 흑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은 프랑스 국왕 장과 그의 아들 필립, 많은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양국사이에는 브레티니의 휴전이 성립하였다. 흑태자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3세, 샤를르 5세가 사망하자 양국은 국내문제로 20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어린 샤를르 6세가 왕위에 오르자 왕족인 오를레앙家와 부르고뉴家 사이에 치열한 붕당 싸움이 계속되어 완전히 분열상태였다.
영국에서도 랭카스터 왕조를 연 헨리 4세의 치세는 농민반란, 국내 대제후들의 세력 다툼으로 어수선 하였다. 그러나헨리 4세를 계승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분열상태를 가만두지 않고 쳐들어갔다. 헨리 5세는 `왕태자 샤를르의 왕위 계승권을 부인하고, 헨리 5세가 샤를르 6세의 딸 캐더린과 혼인하여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는` 트로와 조약을 체결하였다.샤를르 6세와 헨리 5세가 잇따라 사망하자 프랑스는 생후 수개월의 헨리 6세와 그에 결탁한 브르고뉴家가 지배하는 北佛과 부르즈에 도읍한 왕태자 샤를르에 속하는 南佛로 양분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