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과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관한 논의
- 최초 등록일
- 2010.02.23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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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부식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유자적 관인(儒者的 官人)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했다. 그와 그의 저술작은 신채호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송학(宋學)에 대한 사대주의에 치중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본고에서는 삼국사기와 김부식을 둘러싼 사대론에 대해 고려 전반기의 상황과 서경천도운동 등 당시(12세기 고려)의 사회상을 토대로 논의해보도록 한다.
목차
1. 머리말
2. 김부식의 일생과 삼국사기의 편찬
3. 김부식 및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관한 논의
(1) 사대성에 관한 기존의 평가: 사대주의(事大主義)
(2) 사대성에 관한 새로운 해석: 존왕의식(尊王意識)
4. 김부식의 한시: 유자적 관인(儒者的 官人)
5.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김부식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유자적 관인(儒者的 官人)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했다. 그와 그의 저술작은 신채호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송학(宋學)에 대한 사대주의에 치중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본고에서는 삼국사기와 김부식을 둘러싼 사대론에 대해 고려 전반기의 상황과 서경천도운동 등 당시(12세기 고려)의 사회상을 토대로 논의해보도록 한다.
2. 김부식의 일생과 삼국사기의 편찬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로 인종의 명령을 받아『삼국사기』를 편찬, 1145년에 완성하였다. 22세(1096, 숙종 1)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이후 탄탄대로로 승진, 1132년에는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여 1년 2개월 만에 진압하였다. 이후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頤)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1142년에 사직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11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그가 저술한『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로,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3국(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그의 측근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고등학교 국사 교사용 지도서』, 교육인적자원부, 2002
국사편찬위원회,『고등학교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2002
김성기,『김부식의 유학사상과 시세계』, 한국한시학회, 2004
김당택『우리 한국사』, 푸른역사, 2002 (2006 개정판)
박성규,『고려전기 문학사상 연구: 김부식의 문학사상을 중심으로』, 우리한문학회, 2008
두산백과사전: http://www.encyber.com
문화재청: 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