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
- 최초 등록일
- 2010.02.19
- 최종 저작일
-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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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중환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조선시대 지도 택리지와 풍수지리에 관해서...
목차
1. 이중환의 생애
2. 택리지(擇里志)란 ?
3. 특징
4. 택리지와 풍수지리설
5.후기
<참고자료>
본문내용
1. 이중환의 생애
이중환은 (1690 ∼ 1752) 1690년(숙종 16년) 당대의 명문인 여주 이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휘조(輝祖)이며, 호는 청담(淸潭)ㆍ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그의 고조부 이지정(李志定)은 목사를 역임했고, 5대조인 이상의(李尙毅)는 직제학, 이조판서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다. 처가 쪽도 장인인 목림일(睦林一)을 비롯한 직계 4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집안이었다. 또한 성호 이익과는 가까운 친척 간(재종손)이면서, 연령 차이도 그다지 많지 않아 성호의 학풍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24세 되던 해(1713 : 숙종 39)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급제직후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지냈으며, 그가 관직에서 물러날 즈음인 34세 때는 병조정랑(兵曹正郞)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아니 이제 벼슬길이 완전히 막혀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병조정랑을 지낼 때 목호룡(睦虎龍)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잡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이 36살 되던 영조 원년(1725)에는 2월부터 4월까지 네 차례의 형을 당하였다. 이중환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모두 부인하였다. 다시 6차례에 걸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혐의를 부인하여 사형은 면하였다. 그해 12월 절도로 유배당했다가 영조 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이중환의 혐의가 풀려 유배지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12월 사헌부의 논계로 다시 어느 먼 지역으로 귀양을 갔다. 이중환의 나이 38세 되던 때였다. 이중환은 이제 정계에서 반영구적으로 축출된 것이다. 그 후 이중환이 언제 유배지에서 풀려났는지 죽기 전까지 30여 년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다만 택리지에서 사대부의 처지를 논한 부분과 영조 28년의 목회경(睦會敬)의 발문을 통하여 그의 생활과 처지를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참고 자료
택리지. 이중환. 을유문화사. 2002
청소년을 위한 택리지. 이중환. 서해문집.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