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 일대기와 인물평
- 최초 등록일
- 2010.02.01
- 최종 저작일
-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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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왕의 일대기와 평가를 기술한 내용입니다
목차
◎ 불안한 즉위초기
◎ 실리외교의 추진
◎ 왕권의 강화
◎ 익산천도 시도와 실패
본문내용
◎ 무 왕(재위 600-641) ◎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견제하기 위해 수(隋)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여러 번 그의 도움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唐)나라가 일어난 후에는 친당책(親唐策)을 써서 624년(무왕 25)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나라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다 당나라가 백제,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무왕은 또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게 하였다. 630년 사비궁을 수리하다가 가뭄 때문에 중지하였으며,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서 이를 왕의 유흥지(遊興地)로 삼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하여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안으로는 토목공사 등 낭비가 심하고, 밖으로는 신라 공격에 대비하여 자주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 국력(國力)이 많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그의 뒤를 이은 의자왕(義慈王)에게도 인계되어 백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 불안한 즉위초기
무왕(武王/?~641) 백제 제30대 왕(재위 600~641). 이름 장(璋). 법왕(法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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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천도 시도와 실패
비록, 익산천도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옥천회전(沃川會戰)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은 무왕 때에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개혁을 통하여 전제왕권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와 미륵사의 창건과 같은 대규모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