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과거제도(당대의 과거제도) -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0.01.21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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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용하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과거제도’가 태동한 것은 수나라 때부터이다. 비록 집안 등이 과거의 합격 가능성을 좌우하기도 했고, 음서를 통한 관직 진출이 있기도 했지만 과거제도라는 것은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신설했고, 시책(試策)으로 인재를 선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수나라 때부터 과거제가 나름대로의 형식을 갖추고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때 들어와 과거제도는 몇 단계의 발전을 거친다. 이 보고서에서는 사실상 중국 과거제도의 초기 발전단계인 당나라의 과거제도를 살펴보려 한다. 과거제도는 당대 내에서도 다양한 발전과 변화과정을 거쳤는데, 그 단계를 짚어가며 과거제가 당시 시대상황과 맞물려 어떻게 변화, 발전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특히 당대에 명경과가 쇠퇴하고 진사과가 점점 힘을 얻는 상황을 시대적, 제도적, 정치적 배경과 함께 이해해보고자 한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수당시대 이전의 인재 선발방식
3. 과거제도의 변화과정
4. 진사과의 상승
5. 과거제도의 병폐
6. 맺음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용하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과거제도’가 태동한 것은 수나라 때부터이다. 비록 집안 등이 과거의 합격 가능성을 좌우하기도 했고, 음서를 통한 관직 진출이 있기도 했지만 과거제도라는 것은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신설했고, 시책(試策)으로 인재를 선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수나라 때부터 과거제가 나름대로의 형식을 갖추고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때 들어와 과거제도는 몇 단계의 발전을 거친다. 당 고조와 태종 시기에 과거제를 채택해 인재를 선발했지만, 정관 시기 해마다 등용한 진사는 평균 9명쯤이었고 명경은 30~40명이었다. 이는 아직 과거제가 인재선발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당 고종과 무측천에서 현종의 개원과 천보시기까지는 그 이전보다 과거를 통해 선발하는 인재의 수가 확연히 증가했다. 특히 무측천은 집권 이후 인심을 얻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매우 중시했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 말기까지는, 과거제가 사회에 정착되었으나 음서는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과거 출신자와 비과거 출신자의 갈등이 격렬해졌는데, 유명한 우이당쟁(牛李黨爭)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당나라의 과거제는 아직 초기 발전단계에 있었는데, 명문가 출신 관료집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대의 인재선발 방식에서 주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결국 황제권의 강화에도 과거제도가 도움이 되었으며 사회의 민중들에게도 지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 보고서에서는 사실상 중국 과거제도의 초기 발전단계인 당나라의 과거제도를 살펴보려 한다. 과거제도는 당대 내에서도 다양한 발전과 변화과정을 거쳤는데, 그 단계를 짚어가며 과거제가 당시 시대상황과 맞물려 어떻게 변화, 발전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특히 당대에 명경과가 쇠퇴하고 진사과가 점점 힘을 얻는 상황을 시대적, 제도적, 정치적 배경과 함께 이해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쑹창빈, 이지연 역, 천추흥망, 따뜻한손, 2009, p.381
김명희, 「당대 과거제와 사회」, 인문사회과학연구 제8집, 호남대학교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