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9.12.24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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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메이지 유신에 관한 고찰
목차
●메이지유신
●배경
●동맹
●개혁의 내용
●개혁의 영향과 비판
본문내용
3. 제도개혁
폐번치현과 태정관 제도의 개혁을 거쳐 중앙집권 체제가 갖추어짐으로써, 간신히 옛 막부 시대의 제도를 개혁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거의 동시에 궁중 개혁도 이루어져, 구래의 궁중직이나 궁녀 폐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시종등이 메이지 천황을 개혁 군주에 어울리는 천황으로 양육하게 된다. 막부 말기에는 병약했던 메이지 천황도, 사족에 의한 양육 때문인지 건강도 회복하여, 서양식 입헌 군주로서의 마음가짐도 배워, `메이지 국가` 원수로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갔다. 특히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추밀원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고, 또 국회 개설 전후 입헌 정치 미성숙기에 수상이 빈번하게 사임, 교대했을 때에도 정국의 조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분 제도에서는, 에도 막부 아래의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구 무사 계급을 사족, 그 이외를 평민으로 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구 구게, 다이묘나 일부 승려등을 새롭게 화족으로서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궁내성 지배 아래로 두게 되었다.
또한, 유신 정부는 서양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지만, `루스 정부`로 불린 일본에 잔류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등에 의해서, 차례차례로 개혁은 진행되어 갔다.
주 개혁으로는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사족이나 농민의 불만을 사서, 후에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라고도 말해진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나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욱 더 오쿠보 밑으로 내무성이 설립됨으로써 여러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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