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카이사르와 갈리아 전기 조사,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9.12.24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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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사 과제입니다.
제목과 목차 그대로입니다. 참고해주세요 ~
목차
목차
1. 카이사르의 삶과 <갈리아 전기>의 편찬
2. <갈리아 전기>의 구성
3. <갈리아 전기>의 저술 목적
4. <갈리아 전기>의 서술 방법
1) 객관적 서술의 지향
2) 행위 자체에 대한 서술과 운의 사용
3) 문화사적 그리고 문학적 가치
4) 역사서로서의 가치
5. 평가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카이사르의 삶과 <갈리아 전기>의 편찬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마 사회는 마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민중파와 술라를 대표로 하는 원로원파가 로마 통치의 주도권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가문인 집정관 출신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시민권을 놓고 벌인 동맹시전쟁에서 로마에 대해 무기를 들지 않았거나 로마에 다시 충성을 맹세한 모든 이탈리아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긴급법령을 도입했다. 이러한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정책은 원로원파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으며,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마리우스가 군제도 개혁을 통해 실업자 문제를 일부분 해소하고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민중파의 수장에 오르면서 그의 가문은 민중파로 분류되었다. 카이사르의 가문에 대한 민중파로의 분류는 당시 로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로원파가 그 역시도 민중파라고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게다가 민중파 집정관이던 킨나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이러한 의심이 더 커지게 되었다. 결국 술라가 독재정치를 확립하고 민중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나게 되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카이사르는 로마를 떠나 로도스 섬으로 탈출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풍부한 교양을 쌓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그가 편찬한 <갈리아 전기>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술라의 사후 로마에 다시 돌아온 카이사르는 23세에 변호사를 개업하였는데, 변호사로서 유력자나 저명인사를 고발하여 승소하면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기에 변호사는 정계 진출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5. 평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는 그의 정치적 선전과 변호를 위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그와 그의 저작이 훌륭한 역사가와 역사저작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서술된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 서술상의 특징, 또한 나아가 하나의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갈리아 전기>는 당시 서유럽 사회를 보여주는 가장 최고의 문헌이자 문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저서이며 문체상의 수식과 장식이 결여되고 도덕적인 효시를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없는 저작이 아니다. 또한 그 목적이 정치적인 변호와 선전에 있다하더라도
참고 자료
참고 문헌
고려대학교 대학원 서양고대사연구실 편역,『서양고전-고대 역사가와 역사서술사론』, 법문사, 1983
이상신 지음, 『서양사학사,』, 도서출판 청사, 1984
H.E. 반스 지음, 허승일·안희돈 옮김, 『서양사학사』, 한울아카데미, 1994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사이,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