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정권과 문신
- 최초 등록일
- 2009.12.19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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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당택 교수님이 저술한 고려의 무인정권에 기반하여 최씨정권과 문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 글이다.
목차
<崔氏政權과 文臣>
1. 문신들의 出身과 출세방법
2. 최씨정권의 유지와 문신의 역할
(1) 宰樞
(2) 承宣
(3) 臺諫
3. 문신의 정치적 지위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문신들의 出身과 출세방법
최씨집권기에는 소수의 특정한 가문에서 다수의 문신 宰樞를 배출했다. 또한 최씨집권자에게 薦擧되어 출세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최씨집권기에는 3개의 가계에서 16명의 문신 재추를 배출하였다. 그들 가계의 姻戚이나 무인 재추를 제외한 숫자가 그러한 것이다. 인척이나 무인 재추를 포함시키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왜 이처럼 소수의 가문에서 많은 재추를 배출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는 상당히 흥미 있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재추에 오른 인물들과 최씨집권자들과의 관계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조영인의 가계는 3대에 걸쳐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2대에 걸쳐 최씨가와 혼인했었다. 그리고 조여인과 더불어 신종의 옹립에 공을 세운 인물인 김봉모는 금의 사신에 대한 접대에서 비롯해 최씨정권과 밀착관계를 맺게 된다. 이후 그는 추밀원부사를 거쳐 참지정사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김태서는 재상에 오르는데, 그는 아버지인 김봉모의 정치적인 지위에 힘입었다기보다는 그의 아들인 金若先이 崔怡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김약선은 무반으로서 추밀원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동생 金起孫과 金慶孫 역시 재상에 올랐었다.
신종 즉위년(1197)에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된 최당이나 지추밀원사에 오른 최선은 모두 崔惟淸의 아들이었다. 최유청의 자손들은 최당이나 최선에 그치지 않고 그들 이후에도 최씨정권 아래에서 顯達하였다. 따라서 최선의 후손들은 최씨집권자와의 중첩적인 혼인을 통하여 그들의 지위를 더욱 굳혀나갔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검토로 3명 이상의 재추를 배출시킨 가문은 모두 최씨집권자와 혼인관계를 유지했음을 알았다. 즉 최씨가와의 혼인이 다수의 재상을 배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참고 자료
김당택,『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