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민주화운동사적답사
- 최초 등록일
- 2009.12.15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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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울에 있는 민주화 운동 사적지를 답사함으로써, 우리주변에 숨겨진 문화재를 찾고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목차
1. 6월 민주화운동의 시발과 발전
2. 6월 민주화운동의 경과지를 찾는 이유
3. 6월 민주화운동의 경과지를 찾아서
1. 치안본부 남영 대공분실
2. 연세대학교
3. 명동성당
4. 서울광장
4. 6월 민주화운동과 그 의미
본문내용
답사는 87년 당시의 서울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87년, 본격적인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남영동 80번지 구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본격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연세대학교 정문과 6월 항쟁의 상징중 하나인 명동성당을 돌아보며, 당시 민주항쟁에서 명동성당에 시위대가 왜 들어갔으며, 그들을 왜 잡지 못하였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마지막은 바로 서울광장이다. 가장 많은 시위대가 나서서 서울광장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역사적인 그곳, 하지만 너무 일상적이어서 잘 신경을 안쓰는 곳에 대한 답사를 시도하게 되었다.
1. 남영동 대공분실
1987년, 해를 넘어갔으나,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경찰은 이러한 시위의 과정에서 한 학생을 체포하고, 무시무시한 소문이 나돌던 치안본부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많은 고문이 자행되었고, 고문경찰의 고문 끝에 그 학생은 숨을 거두게 된다. 이로인해 여론은 들끓게 되고,경찰은 궁여지책으로 해명을 하게 되는데, 가관인 해명을 한다. “퍽하고 책상을 치니, (놀라서)억하고 죽었다.”
경찰은 이러한 말도 안되는 해명을 버젓이하면서 고문을 은폐시키려고 하였고, 유족도 없는 가운데, 부검을 실시하였다. 모두 비밀유지를 강요받았으나, 한 용기있는 의사는 부검결과
를 폭로하였고, 이를 통하여 고 박종철씨의 사망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바로 이것이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말이다. 그 고문이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남영동 구 치안본부의 대공분실이다. 남영동을 자주가면서도 쉽게 마주칠수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만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일일까?
독재의 무서운 현장, 대공분실
전두환 정권기에서 가장 무서운 곳을 꼽으라면, 남산 안기부와 보안사를 빼놓을수 없지만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역시 무시할수 없는 악몽의 장소이다
참고 자료
역사학 연구소,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이태진, 『동경대생에게 들려준 한국사』, 태학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