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의 생애에 그에 대한 평가
- 최초 등록일
- 2009.12.03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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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항우 본기를 논함에 있어 사마천이란 사람을 알아야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사가 집안이며 한 무제때 태사령이 되었다. 당시 이릉(李陵)이라는 장수가 음모에 휘말려 적의 포로가 되자 그의 처분을 두고 모든 사람이 능지처참을 원했는데 홀로 그가 용감하고 훌륭한 장수라고 옹호하면서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 많은 양의 돈과 궁형 중에 선택을 해야 했는데 당시 명망은 있었으나 그에게는 재물이 넉넉지 않아서 궁형을 택하게 된다. 그 후로 그는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사기를 완성시키려고 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의 명성뿐 아니라 타인의 명성에 큰 관심을 보였고, 특히 치욕을 감수하고 후세에 명성을 날린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도 모두 이릉의 사건 이후 사마천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항우의 생애와 항우에 대한 인물 평가
Ⅲ. 맺으며
본문내용
항우 본기를 논함에 있어 사마천이란 사람을 알아야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사가 집안이며 한 무제때 태사령이 되었다. 당시 이릉(李陵)이라는 장수가 음모에 휘말려 적의 포로가 되자 그의 처분을 두고 모든 사람이 능지처참을 원했는데 홀로 그가 용감하고 훌륭한 장수라고 옹호하면서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 많은 양의 돈과 궁형 중에 선택을 해야 했는데 당시 명망은 있었으나 그에게는 재물이 넉넉지 않아서 궁형을 택하게 된다. 그 후로 그는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사기를 완성시키려고 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의 명성뿐 아니라 타인의 명성에 큰 관심을 보였고, 특히 치욕을 감수하고 후세에 명성을 날린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도 모두 이릉의 사건 이후 사마천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다.
사기를 쓰기 위해 그는 천하를 5번이나 유람했다고 한다. 물론 처음 유람한 것은 20대 초반부터라고 한다. 사기 본기(本記)는 왕들의 이야기를 서술해 놓은 것인데 그 중 제왕이 아닌 항우의 얘기를 수록 했나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수업을 들을 때에는 초한쟁패전시기에는 이렇다 할 왕이 없었고, 또한 항우가 서초패왕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짧은 시기이지만 왕이라고 할 만한 업적은 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사마천역시 항우를 매우 인간적인 면으로 다루고 있는데 항우는 유방과 달리 정이 많았다고 한다. 전쟁에는 항상 우미인이라는 애첩을 데리고 다녔으며, 초나라와 한나라가 대립을 오래 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유방과 직접 맞서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유방은 수레에 같이 탄 아들딸을 버리고 홀로 도망 갈 정도로 정이 없었으며, 아버지가 가마솥에 삶을 위기를 맞이할 뻔했는데도 냉정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정이 많았던 반면 남을 믿지 못하고 처세에 능하지 못했다고 모두들 평가하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