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역사 속의 라이벌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9.11.30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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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일대기와 업적을 통해서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주제를 접한 동기
2. 인물의 생애
2.1 명성황후
2.2 흥선대원군
3. 정치적 관점
3.1 명성황후의 정책
3.2 흥선대원군의 정책
4. 두 인물의 공통점과 차이점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주제를 접한 동기
한 나라가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외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요즈음 북한의 도발로 인해 혹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타국과의 대외 관계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대외정책에 관해 재조명해 보면서 우리나라가 처음 개방 할 당시 대외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개화와 쇄국이라는 서로 상반된 정책 가운데 우리나라는 무엇을 지향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생겨났다. 더불어 근∙현대사 자체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개방과 쇄국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라이벌을 선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이 개방할 당시의 대외 정책, 그 중심에 있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삶과 정책을 비교해 보고자한다.
2. 인물의 생애
2.1 명성황후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여주 근 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 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 흥선 대원군(헌의 대원왕)의 뜻에 따라 1865년 고종의 아내가 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 미국(신미양요, 1871년) 등과 같은 강화도에서의 군사 분쟁으로 나타났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국내적으로도 경복궁을 중건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는 등 전제 왕권 강화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 씨 집안사람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고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민 씨 척신 정권의 후원 하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중도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참고 자료
김제방,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지문사 , 2003
유홍종, 『명성황후 이야기 (논픽션 대한제국의 비극)』, 해누리기획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