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
- 최초 등록일
- 2009.11.25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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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산리 대첩!! 강한 애국심의 결과!!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중국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김좌진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장군의 부대원 3,000여명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편성된 일본군 동지대 5,000여명과의 전투에서 3,000여명을 살상하였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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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중국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김좌진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장군의 부대원 3,000여명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편성된 일본군 동지대 5,000여명과의 전투에서 3,000여명을 살상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단 하루만에 끝난 전투가 아니었다. 21일 아침 8시에 시작되어 26일 저녁까지 6일간을 꼬박 새우며 싸운 6일 전쟁이었다. 10월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그리고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고동하 전투 등 6일간에 걸친 일련의 접전을 통틀어서 청산리 전투라 한다.
청산리 전투에 있어서의 주력부대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병력 1,600명이었다. 독립군 총병력 2,000명 중 80%가 북로 군정서군이었던 것이다. 북로 군정서는 왕청현 십리평에 본부를 두고 있었는데 중국군 측으로부터 조속히 현지를 떠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김좌진은 부대를 백두산 골짜기 깊숙이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지는 화룡현 청산리였다. 해란강을 따라 이동해 가는 독립군의 행열은 십 여 리에 뻗쳤으니 무기를 실은 수레만 하드라도 180여대에 이르렀다. 비전투원까지 합하면 2,800명이나 되는 대식구, 거기다 대포 탄환 등 군장비를 실은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이동하고 있었으니 장관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뒤를 바짝 일본군이 추적하고 있었으니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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