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의 웅진, 사비시대 역사와 유적
- 최초 등록일
- 2009.11.24
- 최종 저작일
- 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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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百濟)의 웅진, 사비시대 역사와 유적
목차
◆ 백제의 웅진시대(熊津時代) 역사
◆ 백제의 웅진시대의 유적
◆ 백제의 사비시대 泗沘時代 역사
◆ 백제의 사비시대의 유적
◆ 백제의 사라진 절터
본문내용
◆ 백제의 웅진시대(熊津時代) 역사
고구려 군에 의해 한성이 포위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때는 이미 개로왕도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 조미걸취의 도움을 받아 문주왕(475-477재위)이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여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동성왕(479-501재위)은 웅진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했고,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재개했다.
금강 유역 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백씨, 사씨, 연씨 등의 신진세력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한성에서 이동해온 남래 귀족과의 세력균형을 꾀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이 때 신진세력이 커져 이를 견제하자 그들의 불만을 샀으며, 그 중 1명인 가림 성주 좌평 백가에게 살해되었다.
무령왕(501-523재위)은 가림성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고,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13년, 516년에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각기 일본에 보내며,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구축하고 유식자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또 호남지역의 적극적인 개발과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한강 유역의 상실로 인한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무령왕대에 백제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게 되었고 강국을 칭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 백제의 웅진시대의 유적
- 공산성(公山城)
한성에서 웅진으로의 천도는 긴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웅진은 차츰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게 된다. 도성은 금강을 배경으로 하고 공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성내에 왕궁을 지어 왕성으로서도 기능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