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 조선후기 사회의 변동
- 최초 등록일
- 2009.10.31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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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조선후기 사회변동
1. 경제구조의 변동
1) 농업 생산력의 발달
2) 농민층의 분해
2. 정치구조의 변동
1) 사림파의 집권과 붕당정치의 전개
2) 붕당정치의 변질과 탕평책의 추진
3) 세도정치의 전개와 삼정문란
3. 농민전쟁의 발발
1) 민란의 배경
2) 민란의 발생 - 평안도 농민전쟁
3) 평안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조선후기 사회를 말할 때 흔히 중세사회가 해체되어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라고 일컫는다. 임진 ․ 병자 양란을 겪은 후의 조선사회는 봉건적인 관계들이 크게 변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농업에 있어서 이앙법의 전국적 보급에 따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하였고, 정치구조가 변동하면서 그 폐단으로 나타나는 삼정문란과 이러한 사회 변동 과정에서 그 피해를 받았던 농민들의 반발인 농민전쟁을 일으키면서 민중의 의식이 성장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중세를 지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여기서 다뤄볼 것은 경제구조와 정치구조, 농민전쟁을 중점으로 하여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겠다.
Ⅱ. 조선후기 사회변동
1. 경제구조의 변동
1) 농업 생산력의 발달
조선전기 경상도 및 강원도 일부지역에서 이용되던 이앙법(移秧法)은 조선후기에 점차 확대되어갔다. 수전(水田)에서는 벼를 파종하는 법이 이앙법으로 바뀌면서 벼와 보리 또는 밀을 삼는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종전과 같은 면적이라도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들고 수확령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앙법과 같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관개 ․ 수리시설이 필요한 것이서 18세기에는 전국의 저수지가 약 6,000개소로 늘어났다.
한편 한전(旱田)에서는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2년 3작 내지 2년 4작의 윤작이 확대되어 가을에 가을보리를 시어 여름에 거둔 뒤 다시 콩이나 조를 심기도 하였다.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우리의 농업환경을 돋구기 위하여 비료의 종류를 개발하고 주는 법을 개량해 나갔으며, 농구도 개량해 나갔다.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농가집성』을 편찬하였다.
수공업도 생산력 수준이 높아지고 경영형태의 변동이 생겼다. 농촌의 부업적 가내수공업이 점차 전업화하고, 부역적 노동력을사용치 못하고 임금노동자를 쓰게 된 관영수공업체제는 해체되었으며, 점차 민영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그 생산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서로 협업 및 분업을 하여 대량생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놋그릇 생산과 같은 일부제품의 생산은 이와 같은 공장제 수공업과 대단히 비슷하였다.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금 ․ 은 ․ 동 등의 귀금속 수요가 늘면서 광업생산이 촉진되었다. 청과의 무역 결제 수단으로 삼던 은의 생산은 물론이고 황해도와 평안도 곳곳에서는 금광이 개발되었다. 놋그릇이나 무기 혹은 화폐의 원료로 쓰일 청광과 동광 개발이 늘어나고 화약을 만들기 위해 유황도 채광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역사의 이해 편찬위원회, 『한국역사의 이해』,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8
최완기,「붕당정치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 한국사 9, 한길사, 1994
이영학,「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지주제의 변동」, 한국사 9, 한길사, 1994
이종수,『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한울출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