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 최초 등록일
- 2009.10.23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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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폴레옹 전쟁과 관련된 조약들 정리입니다
목차
제1절 나폴레옹 전쟁
1. 혁명 프랑스와 유럽
1) 1792년 전쟁
2) 1792년 전쟁의 원인
2-3. 나폴레옹 전쟁
1) 전쟁 명분의 논쟁―겐츠와 오트리브
2) 제1차 연합(1793~1797년)
3) 캄포 포르미오 조약(1797년 10월 18일)
4) 제2차 연합(1789~1801년)
5) 루네빌 조약(1801년 2월 9일)
6) 아미앵 조약(1802년 3월 27일)
7) 제3차 연합 전선(1805~1807년)
8) 나폴레옹 제국
9) 1812년 프랑스-러시아 전쟁
10) 제4차 연합(1813년 6월~ )
11) 드레스덴 회의(1813년 6월 26일~30일)
12) 쇼몽 조약(1814년 3월 1일)
13) 퐁텐블로 협정(1814년 4월 11일)
14) 제1차 파리 평화조약(1814년 5월 30일)
본문내용
제1절 나폴레옹 전쟁
1. 혁명 프랑스와 유럽
1) 1792년 전쟁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발이 유럽 열강에 대한 위협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혁명 이후 프랑스는 새로운 국제정치 태도를 취했고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알자스-로렌 지방과 아비뇽 지방을 병합한 것이다. 이 행동은 프랑스가 모든 유럽 정부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1791년 6월 하순 루이 16세와 그 가족이 해외로 도피하다 발각되어 파리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공동 연합을 구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792년 2월 7일 프랑스에 대한 동맹을 체결하였고 4월 20일에는 드디어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2) 1792년 전쟁의 원인
1792년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첫 번째는 공화정과 군주정의 상반된 이데올로기의 전쟁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두 번째는 프랑스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혐오정책의 결과라는 견해이다. 이는 구체제 프랑스의 외교적 전통을 혁명 프랑스가 계승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마지막은 특정한 국가의 정책으로 보는 시각인데, 특히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정책이 문제되고 있다. 프로이센의 영토 팽창 정책을 전쟁 원인으로 보는 견해이다.
2-3. 나폴레옹 전쟁
1) 전쟁 명분의 논쟁―겐츠와 오트리브
유럽 국제 사회의 기본 명분인 세력 균형 원칙이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파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유럽에 팽배하였다.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국들은 나폴레옹을 세력균형의 파괴자로 규정한 반면, 나폴레옹은 영국이 유럽 질서를 해체한다 하며 영국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프랑스를 대변한 오트리브와 영국을 대변한 겐츠의 논쟁으로 대표된다. 오트리브는 진정한 세력균형을 영토와 군사력의 균형이 아니라 해양과 통상의 균형으로 보고, 특히 위트레히트 조약 이후 해양을 독점한 영국이 유럽 국가체제를 파괴하는 근본원인이라 주장하였다. 즉, 대륙 국가들은 프랑스와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겐츠는 세력균형을 영토적․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그 파괴자를 혁명 프랑스로 규정하였다.
참고 자료
김용구, 세계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