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설화는 어디에서 들어왔는가
- 최초 등록일
- 2009.10.12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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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의 틀을 그들의 지배정책, 곧 응집력이 강한 한국문화를 해체시켜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려고 했던 분할통치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구전되는 설화들을 보조적인 자료로 하여 그 원류를 상고함으로써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하여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해 문화사론적 연구방법론을 원용하기로 한다.
목차
▷▶ 출현신화와 밭곡식 재배문화
▷▶ 난생신화와 어로문화
▷▶ 천강신화와 유목, 수렵문화
본문내용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의 틀을 그들의 지배정책, 곧 응집력이 강한 한국문화를 해체시켜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려고 했던 분할통치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구전되는 설화들을 보조적인 자료로 하여 그 원류를 상고함으로써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하여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해 문화사론적 연구방법론을 원용하기로 한다.
▷▶ 출현신화와 밭곡식 재배문화
1) 금와왕 탄생담
[자료 1] p. 187
양주동은 발(發), 부여(夫餘), 부리(夫里), 벌(伐), 불불(不弗), 불(弗) 등은 나라 혹은 벌판을 의미하는 한국어 ‘’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한다.
‘금와왕 탄생담’이나 송양왕의 ‘비류왕 양도신화’, 비류의 ‘미추홀 양도신화’ 등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양주동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 까닭은 부루나 비류라는 신화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비류라는 나라의 이름이 수도경작(水稻耕作)의 농경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벌’과의 친연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더욱 명확하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해부루 집단이 어떠한 형태의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그 사람들은 대대로 정착하여 살았는데, (거기에는) 궁실도 있고 창고도 있으며 감옥도 있다. 산과 언덕, 넓은 못들이 많아서 동이지방 가운데서는 가장 평평한 땅이다. 토지는 오곡을 심는 데는 알맞아도 五果는 나지 않는다.
이 기록은 부여족이 대지의 원리를 신봉하고 벼를 재배하던 농경민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 기록에서는 사람들이 대대로 정착하여 살았고 이것은 부여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지방에서 정착생활을 했던 농경민이었음을 말 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기록의 밑 줄 친 부분은 이러한 추정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고조선 다음으로 등장한 부여는 만주에 있는 송화강 유역을 무대로 성장했고, 그 중심지는 이통하 부근의 장춘과 농안 일대로 추정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