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시스와 성 도미니크의 청빈과 영성
- 최초 등록일
- 2009.10.10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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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 프란시스와 성 도미니크의 생애, 청빈과 그 영성에 대해 짧은 소 논문 형식으로 나타냈다.
목차
1. 서 론
2.프란시스에 대하여
⑴ 프란시스의 생애
⑵ 프란시스 수도회
⑶ 프란시스의 영성
3. 도미니크에 대하여
⑴ 도미니크의 생애
⑵ 도미니크 수도회
⑶ 도미니크의 영성
4. 탁발 수도회가 중세 교회에 미친 영향
5. 결 론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 론
13세기 탁발 수도회가 나타난 시대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상·공업의 발달은 중산층을 발생하게 했고, 이런 경제적 변화는 화폐를 발달하게 함으로 새로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갔다. 화폐가 신분상승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고, 무역업자, 상인, 장인 등의 중산층은 새로운 윤택한 삶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중세 사회를 황금만능주의의 시대로 만들고 있었다. 십자군 운동으로 인해 교회에 재산이 축적 되고, 성직자들은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재물에 눈이 멀어버렸다. 평민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사회 전체가 혼란하고 혼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베네딕트나 클루니 수도원등의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들도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고 사회에 동화 되어 가버렸다. 이런 상황들은 오늘날의 우리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옛날 성철이라는 승려가 입적했다는 소식은 온 나라에 퍼졌고, 매스컴은 그의 일대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했던 것은 그의 청빈했던 삶 때문이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고무신과 승복 한 벌이 전부였다는 것에 불교인이 아닌 사람도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인도 뉴델리에서 환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함께 40여년을 생활하다가 죽은 마더 테레사도 그의 헌신적인 봉사정신과 함께 청빈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전 세계 사람들이 애도를 표시했다.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라는 민중들의 비난을 받고,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자기 배만 채우는 배부른 돼지이다.’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고 전파된 지 100여년이 흐른 지금 기독교는 큰 성장을 이룩했다. 이 뒤에는 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의 고난과 피, 기도가 있었지만, 샤머니즘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백성들에게 축복이라는 말로 교회의 성장을 이끌어낸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 정부와의 유착은 부당하고 부정적인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에 사회의 큰 질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그것을 듣지 않고 성전 건축, 수양관등을 짓고, 목회자들은 교인수 자랑을 하고 사례비나, 고급 승용차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제 교회는 가난에 대해서 이제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긍정적이지 않으며 혐오하고 싫어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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