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군제사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9.10.10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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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학-최효식 교수님의 조선후기 군제사 연구 책의 요약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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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책은 인조반정으로 대비정권을 물리치고 집권에 성공한 서인세력들을 친명외교를 천명하면서 궁궐과 도성외곽을 수비하는 병영창치에 모든 힘을 경주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왕조 후기의 주요군영의 대부분의 인조대에 장치되고 있다.
이것은 군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군영의 창치 및 그 강화는 내란과 외침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중앙군영의 창치와 그 실권의 장악은 붕당간의 정치적 배후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없지 않았고, 국왕 친위병의 창치는 이들 신권을 제압한 뒤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군영에 있어서의 고민은 양역변통과 관련하여 특히 재정문제 때문에 상주급료병보다는 상번군을 강화하려는 면도 있어 급료병과의 사이에 국왕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증감이 교차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 후기 중앙군제는 어영청을 비롯하여 훈련도감․총융청․금위영․수어청의 5군영과 용호영․호위청등 국왕친위병으로 조직되었다. 이미 조선왕조 전기 중앙군의 근간인 5위제는 대역납포가 자행되자 허설화되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제의 복구가 절실히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의 정세변화 또한 인조왕정으로 하여금 군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5군영 가운데 금위영을 제외한 대부분이 인조대에 창치된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이와 같이 중앙군제의 재편과정을 거치면서 도성방위 군영으로 용병의 성격이 농후한 훈련도감, 전국의 향병이 상번하는 어영군․금위영과 도성외곽 방어군영으로 경기도 병력을 요새지에 집결토록 조직화된 총융청․수어청이 있고 국왕 친위병인 용호청․호위청등이 있었다.
어영청에 있어서는 그 창치와 편제․역할 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영군은 후금 내침시 국왕이 친정하여 군사의 사기와 국민의 항전의식을 고취시켜 적을 격퇴시킨다는 방책에서 비롯된다.
인조 초에 당면한 군사정책은 대내외정세 때문에 특히 도성과 변방에 대한 방비를 강화시키는 데 있었다. 우선 변방은 본도병력 1만 3천여에다 하삼도로부터 징용된 1만 5천여를 부방군에 편입시켜 대비하도록 했지만 도원수 장만은 최소한 5만 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도성방비가 더 시급하였던 만큼 경기병력을 이에 소속시키려는 계획 아래 부방굼에서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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