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
- 최초 등록일
- 2009.10.10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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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학-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에 관한 무역내용과 대일 무역의 선구자 동래 상인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
Ⅲ. 대일 무역의 선구자, 동래상인
1. 개시무역(開市貿易)
2. 왜채의 증가
3. 동래 상인
Ⅳ. 맺음말
※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대한민국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2007년도 총수출액 중 반도체는 약 390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10.5%를 차지하며 자동차와 선박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주력 수출 상품이다. 반도체가 한국의 대표적 상품이듯 물산이 풍부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대외 교역에서 인삼은 한국의 대표 상품이었다. 특히 고부가가치로 오늘날의 반도체처럼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했었다. 인삼이 무게나 부피가 작으면서 가격이 꽤 높은 점도 반도체와 유사하다. 주로 산삼이 거래됐던 조선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최상품 인삼의 가격은 금처럼 비싸게 거래된다.
17, 18세기 들어 일본으로 인삼 수출이 활발했다. 1609년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매년 40여 척의 무역선이 은, 동, 납, 유황 등을 싣고 동래 왜관에 들어와 교역했다. 주 수출품은 인삼과 마른 해삼, 중국산 명주실과 비단이었고, 주 수입품은 은과 동 등이었다. 초기에는 인삼 300~500근 정도의 공무역만 허용했는데, 1638년 무렵에는 인삼의 사무역이 허용되었다.
특히 17세기 중엽 일본 사람들의 인삼 선호가 강해지면서 일본으로의 수출이 급증하였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일본으로의 인삼 수출은 격감한다. 산삼이 희귀해지면서 가격이 급등해 일본은 대량의 은 유출로 재정 압박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일본 내의 인삼 수요는 여전하여 일본은 중국의 광동으로부터 미국의 값싼 삼을 수입하고, 조선에서 몰래 인삼 씨를 유입해 국내 생산에 착수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되고 국제 결제수단이었던 인삼과 은의 감소로 동아시아 3국의 무역도 쇠퇴했다.
아래에서는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에 대한 삼은 교환체제와 그 무역을 담당했던 동래상인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 하겠다.
Ⅱ.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
인삼이 맨 처음 외국에 수출된 것은 6세기 초반이었다. 백제 무령왕 12년(513년)에 양나라 무제에게 인삼을 바친 것이 기록에 나오는 첫 번째 사례이다. 그 뒤 고려시대에도 중국과 일본 등지에 우리나라 인삼이 수출되었는데, 대개 예물 교환의 성격이 짙었다. 인삼수출이 크게 확대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이다. 특히 17세기 후반의 약 50년 동안이 인삼수출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한일관계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