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구운몽>
- 최초 등록일
- 2009.09.24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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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만중 <구운몽>
목차
◉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구운몽」의 의의
◉「구운몽」의 표현
◉「구운몽」의 구성
◉「구운몽」의 사상
본문내용
◉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김만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서포 김만중은 어머니의 지극한 정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16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 직언도 불사하는 강직성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김金`씨 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예조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 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변덕쟁이 임금인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유배지에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쓴 것이「사씨남정기」이다. 이 와중에 그의 어머니 윤씨는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으나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은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 점 등에서 사상의 진보성을 찾을 수 있고,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은 문학이론에서의 진보성을 보인다. 김시습의「금오신화」이후 허균의 뒤를 이어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나타난 그는 우리 문학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즉, 소설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에 소설의 가치를 인식, 창작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후 국문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국자의식(國字意識)은 높이 살 만하며 특히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쓴「사씨남정기」나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순수한 우리말로 유배지에서 쓴「구운몽」같은 국문소설의 창작은 허균을 잇고 조선후기 실학파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