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인 사령운과 작품감상
- 최초 등록일
- 2009.09.11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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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작가 사령운의 삶과 그의 작품의 특징, 그리고 登池上樓(등지상루), 石門巖上宿(석문암상숙)에 대한 해설과 자세한 작품 설명 및 개인적인 감상까지 들어 있습니다.
특히 작품 해설에는 단어 설명까지 다 조사해놓았습니다.
목차
1. 작가 사령운에 대하여
2. 사령운 작품의 특징
3. 작품 감상
4. 개인적인 감상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작가 사령운에 대하여
사령운(385년-433년), 어릴 때의 이름은 客兒(객아)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산수시인이라 불리는 그는 진양 양하 즉 지금의 河南省 太康(허난성 태강현)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會稽(회계)라는 지금의 浙江省(저장성)으로 이주해 살았다. 东晋의 고급 관료이며 대지주인 謝씨 집안의 출신으로 謝玄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대단한 재능이 있었고,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성격도 사치스러웠다. 太元말 18세에 康樂公(강락공)이란 봉작을 세습 받았다. 그래서 세칭 謝康樂(사강락) 이라고 부른다. 동진 때 관직이 상국종사 중랑까지 올라갔으나, 劉(유)씨의 宋 왕조가 세워지자 爵(작)에서 候(후) 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少帝가 즉위하자 永嘉(영가: 지금의 절강성 원주)로 좌천되었다. 그는 정치적 권세에 열중했고, 또한 문벌가문 출신 이었으나 송에서 중용되지 못함에 따라 마음속에 늘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었다. 이에 비록 몸은 관직에 있었지만 정무를 돌보지 않고 마음대로 산수를 유랑했다. 실의에 빠진 채 산수만을 벗하며 지내다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는 會稽(회계)로 이주하여 첩거 하였다. 文帝때 다시 벼슬길로 나섰다가 병을 핑계로 다시 사직하였다. 결국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벌목하여 길을 내고 기묘한 경치를 찾아다니는 것으로써 정치적인 불만의 정서를 스스로 위로 했다. 만년에는 탄핵을 받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군사를 일으켜 항거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광저우로 추방되었으며 그 후 433년에 모반죄로 처형(피살되었다는 얘기도 있음)되었다. 모반죄로 처벌되어 그가 남긴 작품들도 함께 소멸되어 지금 남은 사령운의 작품은 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령운은 시와 그림에 아주 능하였으며, 불교와 노장 사상에 정통하였다. 劉宋(유송)시기에 현언(玄言)시에서 벗어나 산수시를 창시하여 문학사적 공헌을 하였다. 당대의 산수시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 사령운 작품의 특징
사령운의 불행한 생애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들도 순탄치 못한 발자취를 안고 있다. 그의 다소 괴팍하고, 돌출적인 언행으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인 평가가 내려지고, 심지어 그의 작품의 전래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로 그의
참고 자료
사령운시선 - 문이재(2002)
중국시가 감상 - 학고방 (2006)
황하에 흐르는 중국명시 - 현학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