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기신라의 재발견, 냉수리비와 봉평비
- 최초 등록일
- 2009.07.09
- 최종 저작일
- 2009.07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금석문 `냉수리비`와 `봉평비`에 관한 리포트입니다.
두비석이 신라라는 배경안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서 리포트를썼습니다.
목차
Ⅰ. 금석문이 가지고 있는 원문 및 해석
Ⅱ. 금석문에 대한 역사적 해석
Ⅲ. 나의 의견
본문내용
Ⅱ. 금석문에 대한 역사적 해석
1. 상고기 신라의 6부체제
- 단위정치체계에서 행정 단위가 되기까지-
① 부(部)를 지배한 자 ‘간지’
- 신라 520년 17관등제가 성립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화가 되는 ‘진흥왕’이전의 신라는 왕과 더불어 ‘간지’라고 하는 6개의 단위정치체계가 지배하는 국가체계였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과도기인 ‘냉수리비’의 지증왕 때와 ‘봉평비’의 법흥왕‘ 때는 상고기 신라의 6부체제를 잘 보여준다. 우선 ’간지‘라는 말은 몽골의 ’칭기즈 칸‘이 군주라는 의미로 사용한 ’카간‘처럼 신라에서도 소국을 다스리는 군주를 ’간지‘라고 불린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냉수리비‘와 ’봉평비‘에서 이들의 인명표기 방식이 다른 완이나 촌주와 같이 ‘이름+간지’인 것으로 보아 각각의 부를 자치적으로 다스린 지배자였다고 볼 수 있다.
② 국왕이 다스리는 곳 ‘훼부’와 ‘사훼부’
- 하지만 이러한 자치적 단위체제의 6부들을 왕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은 곳으로만 볼 수는 없다. 특히나 ‘봉평비’가 세워진 524년은 이미 국왕에 의한 17관등제가 성립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냉수리비’와 ‘봉평비’에서 보여지는 6개의 부는 ‘본피부’, ‘사피부’, ‘잠훼부’, ‘한기부’, ‘훼부’, ‘사훼부’이다.
참고 자료
고대로부터의 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