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9.07.03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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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해 한용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요약-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만해 한용운 ( 萬海 韓龍雲 1879 ~ 1944 )
2. 한용운의 사상
3. 한용운의 작품세계와 문학사적 위치
본문내용
1. 만해 한용운 ( 萬海 韓龍雲 1879 ~ 1944 )
승려ㆍ시인ㆍ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응준(應俊)이다. 유년 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 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 <불교대전>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ㆍ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 등과 교유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