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정조의 華城經營에 관한 보고서

등록일 2002.02.26 한글 (hwp) | 29페이지 | 가격 9,000원

목차

Ⅰ. 머 리 말 ················1

Ⅱ. 현륭원 천봉과 신읍치의 민생대책······3

Ⅲ. 화 성 축 성 ···············9

Ⅳ. 장용외영의 설치 ············18

Ⅴ. 농 업 진 흥 책 ·············21

Ⅵ. 맺 음 말 ···············25

♠ 參 考 文 獻 ♠············· 27

본문내용

수원(水原)의 역사는 세월만큼이나 또 근대의 최초의 계획도시가 상징하고 있는 의미만큼 많은 전설과 신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수원은 옛적에는 한반도의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삼국간(三國間)의 치열한 쟁패로 일진일퇴를 거듭한 역사의 현장이었으며, 뒷날에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효심이 깃든 효원(孝園)의 고장이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조상의 얼이 서린 문화유적이 곳곳에 많이 산재해 있으며, 다른 도시에 비해 수원은 확실한 역사성과 그 고적이 많이 산재되어 있다. 이를테면 수원은 우리나라 성곽(城郭)의 백미(白眉)라 불리우는 화성(華城)을 비롯한 유서깊은 문화유적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자랑스런 터전일 것이다.
일찍이 정조(正祖)는 1789년 10월 비운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을 최길지(最吉地)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부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園) 이장을 계기로 부읍치(府邑治)를 옮기는 대대적인 신도시 건설 작업을 추진했으며, 정조 17년 1월 수원부를 '화성'으로 고치고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당시 화산 아래에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전시키고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 현재의 수원이다.
이어 추진된 화성성역(華城城役)은 1794년(정조 18년) 1월 정조가 수원에 직접 행차하여 성역(城役)의 대강령(大綱領)을 하교하면서 시작되었다. 1789년 아버지의 묘소를 옮겨 모신데다가, 장차 왕위를 세자에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가서 살아갈 곳이라 하여 수원을 마치 고향처럼 생각하였던 정조는 행궁과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공사를 엄청난 열정으로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당초 10년으로 예상하였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어 34개월 만인 1796년(정조20년)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치룸으로써 완결되었다.
화성성역은 정조대 전반 규장각(奎章閣)과 장용영(壯勇營)의 설치에 뒤이어 정조대 후반을 대표하는 사업으로서, 축성(築城) 이후 수원의 대도회(大都會)로의 발전 시책으로 연결되어 정조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정조 24년의 재위기간 중 정조 1789년(정조 13년) 영우원(永佑園)의 수원 천봉(遷奉)까지가 그 여건 조성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면, 장용영의 강화와 연계되었던 화성성역의 추진과 그를 뒤잇는 대도회로의 발전계획, 그리고 농업진흥책의 실시는 정조대 후반기 정조의 원대한 정치적 구상의 실천과정이었다.


참고 자료

·민족문화추진회 편,『正祖實錄』, 서울민족문화추진회, 1993.
·한영우,『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사, 1998.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한국의 문화유산』, 부산대학교 출판부, 1998.
·崔洪奎,「城郭硏究-華城築城 200주년의 의미」『鄕土史硏究』제9집, 수원 경기향토사연 구협의회, 1997.
·崔洪奎,「正祖代의 華城經營과 壯勇外營 문제-특히 邑民對策과 관련하여」『京畿史學』창 간호, 수원 경기사학회, 1997.
·유봉학,「華城城役의 역사적 의의와 華城의 문화유산」『鄕土史硏究』제9집, 수원 경기향 토사연구회, 1997.
·유봉학,「正祖代 정국 동향과 華城城役의 추이」『奎章閣』제19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6.

이 자료와 함께 구매한 자료

      최근 구매한 회원 학교정보 보기
      1.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수와 학교정보이며
         구매한 본인의 구매정보도 함께 표시됩니다.
      2. 매시 정각마다 업데이트 됩니다. (02:00 ~ 21:00)
      3. 구매자의 학교정보가 없는 경우 기타로 표시됩니다.
      최근 본 자료더보기
      추천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