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과 중화학공업 박정희 양날의 선택
- 최초 등록일
- 2009.06.04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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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유신시대의 모습을 분석해보고
그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 보이는 문제간의 합의점을 찾아본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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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박정희에 대한 수많은 설과 사실들은 거두절미하고 유신과 중화학 공업 분야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이 논의의 최소한의 논점이다라는 것을 밝힙니다.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것은 1969년 있었던 닉슨 독트린의 선언이었다. 닉슨 독트린을 요약하자면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안보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 아시아 국가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것의 표명이었다. 이는 당시 미군에 의해 안보를 거의 보장받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에게는 최악의 시련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책에서는 미국과 박정희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그 가운데에서도 박정희가 미국을 잘 이용했다는 것을 이해시키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 1969년 당시 스칼라피노 교수와의 대담에서 미군의 철수 예상과 그에 대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안보가 가장 중대한 문제였던 시대적 상황에서 아직 궤도에 오르지 못한 군 기술의 현대화와 과학기술의 뒤떨어짐을 끌어올릴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의 철수는 중화학 공업에 대한 의지를 태우게 된다. 중화학 공업은 무기 산업의 핵심이다. 박정희는 이 무기산업에 대한 의지가 정말 대단했다.
http://tong.nate.com/kimbkimb/30699606
“중공업 육성하면 탱크 만들 수 있다”
기자는 수소문 끝에 ‘그때 그 시절’ 얘기를 소상하게 아는 세 명의 과학자를 만났다. 1970년대 ADD 3총사로 불리던 이경서(70), 홍재학(74), 구상회(71) 박사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시한 긴급 무기개발사업 ‘번개’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다. 당시 ADD의 설립 배경과 상황에 대해 구상회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정책’을 실현하자는 취지였어요. 1960년대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해 군비(軍備)를 증강했습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같은 해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죠. 북한의 무력도발이 격해지던 시기였어요. 1970년에는 닉슨 독트린 발표 후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이런 국내외 정세에 ‘아차’ 싶었던 거죠.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겁니다. 자주국방이란 게 입으로 부르짖는다고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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