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전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9.04.17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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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치원전에 대한 고찰
목차
1. 崔致遠, 그는 누구인가
1.1. 崔致遠의 성공과 번민
2. 傳奇小說 <崔致遠傳>
2.1. 殊異傳
2.2. <崔致遠傳>의 장르적 성격에 대한 논의
(傳奇小說의 효시에 대한 논의)
2.2.1. <崔致遠傳>을 설화로 보는 견해
2.2.2. <崔致遠傳>을 전기소설로 보는 견해
3. <崔致遠傳> 원문
3.1. <崔致遠傳>의 간단한 구조
4. 마무리
본문내용
1. 최치원, 그는 누구인가.
1.1. 최치원의 성공과 번민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치다가 돌아온 육두품 출신의 문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생애가 <삼국사기> 열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자는 고운(孤雲)이라고 했다. 서라벌 출신이지만 가계는 뚜렷하지 않다고 했으니 육두품이라고 생각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공부를 좋아했다 한다. 12세 때 당나라로 떠나보내면서 아버지는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출세를 당나라에 가서 이룩해 누대의 한을 풀어달라고 그렇게 당부했다.
최치원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3년 뒤에 벼슬길에 올라 율수현위가 되었다. 임기가 끝나고 잠시 무직 상태에서 방황하다가, 국가 변란을 수습하는 절도사 고병에게 발탁되어 서기의 임무를 맡고 변란의 수괴를 규탄한 <격황소서>를 대필해 능력 발휘의 기회를 얻었다. 그 글은 변려문의 격식에 따라 말을 꾸민 솜씨가 뛰어나 천하명문이라는 평가를 얻고, 최치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했다. 당대에 중국에 간 외국인이 한문으로 글을 써서 그렇게까지 인정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성공사례여서 후대인이 두고두고 흠모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활동은 하지 못했다. 외국인을 불러들여 진출의 기회를 허용하고는 명백한 한계를 두어 계속 머무르지 말고 돌아가 문화이식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것이 당나라가 세계제국을 경영하는 방법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예외자일 수는 없어 최치원은 소외와 고독에 시달리다가 귀국해야 했다. 신라 조정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공적을 치하하고 한림학사의 직위를 주었으나, 최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날이 어지러워지는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글을 올려도 허사였다.
외직으로 나아가 몇 고을을 돌아다니던 끝에 난세를 비판하고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마침내 신선이 되어갔다는 전설을 남겼다. 이미 후삼국의 쟁패가 벌여졌는데 신라를 위하여 끝까지 애써야 할 이유가 없고,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