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지리] 강화도 리포트

등록일 2001.12.14 한글 (hwp) | 31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강화도에 관한 모든것, 사진과 그림 삽입, A+

목차

A.답사지 조사내용
1.강화도를 답사지로 선정한 이유
2. 강화도의 역사
1) 강화도의 역사적 흐름
2)명칭의 역사
3. 강화도의 위치와 지형
1) 위치
2) 지 형
ㄱ. 간척의 자연적 배경
ㄴ.역사적 배경
a. 고려 말의 간척 사업
b. 조선 후기의 간척 사업
c. 간척 기술의 발달
d. 간척지의 확장
e. 해안선의 변화
3) 자연생태
ㄱ. 기 후
ㄴ. 산 세
ㄷ. 식 생
4. 관광지 및 주요 문화재
1) 강화팔경
2) 사 찰
3) 명 산
4) 문화유적
5) 국방유적
6) 성과 루
7) 능총과 묘
8) 지석묘
9) 천연기념물
10) 약수터
11) 인물과 생가
5. 기 타
1) 특 산 품
2) 전 통 놀 이
3) 풍 습

B.강화도의 숙박과 교통
1. 교 통
1) 지방에서 출발
2) 서울에서 출발
3) 강화내에서
4) 막힐 때, 돌아가는 길
5) 잘못된 도로 표지판
2. 숙박시설
1) 가족호텔 및 여관
2) 강화도의 팜스테이

C. 답사내용
1. 강화도로 떠난 사람들

D.강화도 답사 중 느낀 문제점과 개선방안
1. 상방리 관리사무소 ~ 기도원
2. 기도원
3. 기도원 ~ 참성단
4. 참성단, 헬기장 봉우리
5. 내려오는 길

E. 강화도의 새로운 관광상품
(우리가 강화도를 답사하면 느낀 것을 바탕으로)
1. 추천 강화도 여행코스 : 자전거 하이킹과 역사기행을 동시에!

본문내용

2. 강화도의 역사
1) 강화도의 역사적 흐름
강화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백제・고구려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자리잡아왔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생각되는 관미성이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될 정도 강화도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었는데, 이로써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고, 강화도 또한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당시 군 이름은 穴口(혈구) 혹은 甲比古次(갑비고차)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고목근현)이 되었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한강 유역을 되찾았고, 다시 신라의 영역을 들어가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강화는 海口郡 또는 穴口鎭이라 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민족사에서 잊지 못할 항쟁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고려는 1231년에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였다. 그 후 강화도는 1270년에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몽고군과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때부터 강화를 江都로 불렀으며,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왔던 三別抄는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당시의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과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고려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도 이곳 강화도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고려 청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133호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일제시대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고려시대 강화도에서는 남쪽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은 인조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 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font color=aaaaff>..</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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