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등록일 200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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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묘건설은 궁궐 및 성곽건설과 함께 조선왕조 건국 후 시행한 국가 차원의 첫 대역사 였다. 태조는 1394년 10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유교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인 동쪽에 종묘, 왼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해에 세웠다. 창건 당시 종묘는 신주를 모시는 신실, 죽 감실 5칸과 좌우에 각각 협실 2칸을 갖춘 규모의 건물이었다. 태조의 4대 조상과 비의 신위를 모셨던 감실은 그 후 승하한 태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5칸이 모두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1421년) 별묘인 영녕전을 종묘 서쪽 뒤편에 새로 지어 그 곳에도 신위를 모시게 된다.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그 후 종묘는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광해군 때 중건된 후 봉안되는 신위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게 되면서 지금과 같이 옆으로 길게 늘어난 정전과 영녕전 건물이 되었다. 원래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칭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고 부른다.목차
없음본문내용
종묘건설은 궁궐 및 성곽건설과 함께 조선왕조 건국 후 시행한 국가 차원의 첫 대역사 였다. 태조는 1394년 10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유교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인 동쪽에 종묘, 왼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해에 세웠다. 창건 당시 종묘는 신주를 모시는 신실, 죽 감실 5칸과 좌우에 각각 협실 2칸을 갖춘 규모의 건물이었다. 태조의 4대 조상과 비의 신위를 모셨던 감실은 그 후 승하한 태조의 신위를 모시면서 5칸이 모두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1421년) 별묘인 영녕전을 종묘 서쪽 뒤편에 새로 지어 그 곳에도 신위를 모시게 된다.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그 후 종묘는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광해군 때 중건된 후 봉안되는 신위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게 되면서 지금과 같이 옆으로 길게 늘어난 정전과 영녕전 건물이 되었다. 원래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칭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고 부른다.판매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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