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18현

등록일 2001.06.10 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500원

목차

1. 최치원(崔致遠)
2. 설총( 聰)
3. 안향(安珦)
4. 정몽주(鄭夢周)
5. 김굉필
6. 송준길
7. 정여창
8. 조광조
9. 이황
10. 이이
11. 성혼
12. 김인후
13. 이언적
14. 신독제 김집선생
15. 김장생선생
16. 송시열
17. 조헌
18. 박세채

본문내용

1.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문장가.학자.자는 고운 또는 해운
경주 이씨의 시조이다. 일찍이 그는 학문에 대한 높은 뜻을 품고,869년 12세때 혼자 당나라에 건너가서 공부 했으며 874년에는 빈공과라는 과거시험에 장우너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계속 학문에 힘써 <중산부궤집> 5권을 완성하였다. 그의 글재주는 날로 이름을 떨쳤으며, 벼슬도 차츰 올라가서 승문랑,시어사,내공봉에 올라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879년 산둥지방애서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때 최치원은 정부군의 제도행령 병마도를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반란국 토벌에 참가 서기의 책임을 맡고 4년동안 서류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특히 881년에 황소의 반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지은 <토황소격문> 은 뛰어난 문장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글로 당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게되었다. 885년 당나라의 모든 영광을 물리치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하자 그는 곧 한림학사에 입명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신라의 운명은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그대까지 익혀온 학문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지방 장관으로 내려갔다. 진성여왕 8년에는 "시무10조"를 건의하여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그 뒤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며 해인사,쌍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을 찾아서 돌아다녔다. 오늘날 불리는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은 최치원의 자인 "해운"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뒤 그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계원필경> 20권과 그 밖의 문집 30여권 등의 많은 책을 지었으나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계원필경> 과 몇 수의 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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